'분단 이래 첫 합의' 7·4 공동성명…비밀리에 만난 남북
이후랑 중앙정보부장, 비밀리에 서울~평양 오가
예나 지금이나…'주한미군 철수' 억지부린 북한
역사적 성명으로 시작된 대화…3년만에 막내려
1972년 7월4일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선 동시에 하나의 성명이 발표된다. 한반도의 허리가 끊어진 뒤 남과 북이 처음으로 '통일'에 대해 합의한 '7·4 공동성명'이다. 양측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3대 원칙을 세웠고,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약속했다. 남과 북의 상설 직통전화도 이때 공식 설치됐다. 역사적 소식을 전한 당시의 뉴스 첫 마디는 이랬다. "사반세기 동안 막혔던 남과 북 사이에 대화의 길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냉전의 끝자락, 국제적인 데탕트(화해) 분위기에 힘입은 7·4 공동성명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반도에 처음으로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생겨난 것이다. 1970년대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북한과 박정희 정권 들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던 남한의 국력이 가장 비슷한 위치에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무력 지양'이라는 통일의 원칙도 이때 정립됐다. 박정희 정권에서 나온 선언이라 지금까지 보수 진영에서 부정하지 못하는 원칙이며, 진보 세력도 인정하는 결실이다.
통일부가 6일 공개한 정치 분야 남북회담 문서(1678쪽 분량)에 따르면 이런 결실이 나오기까지 남과 북 사이 비밀스러운 사전 접촉이 있었다. 이번 문서에는 7·4 공동성명 발표 전 양측의 비밀접촉 과정부터 성명 발표, 남북조절위원회 회의 진행과정 및 회의록 등이 포함됐다.
남북은 판문점에서 11차례에 걸쳐 만나 실무진 고위급 상호 방문을 협의했고, 1972년 3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으로 넘어가 '김일성 동생'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만났다. 한 달 만인 4월에는 북측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로 와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가졌다. 남북 고위급 인사들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각각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도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남과 북은 관계 개선을 위한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를 시작했다. 성명 발표 3개월 만인 1972년 10월의 일이었다. 양측은 ▲자주적 평화통일 실현 ▲군사적 충돌 방지 ▲대외 활동에서의 남북 공동보조(共同步調) 등 내용이 담긴 합의서를 교환했다. 당시 남북조절위 정식 위원명단을 보면 훗날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은 최규하 대통령특별보좌관, 김대중 정부 들어 초대 통일부 장관을 지낸 강인덕 중앙정보부 제9국장이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양측은 1972년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3차례에 걸쳐 '남북조절위 회의'를 가졌다. 교류·협력 사업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고, 대결 상태를 종식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그러나 '해결이 용이한 분야'부터 협력을 시작하자는 우리와 달리 북측은 '각 분야의 광범위한 합작'을 고집했고, 여기에 군비 축소를 선결하자는 억지까지 부리면서 '통일 기대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입맛대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북한의 태도는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화의 불씨를 살리려는 남측의 노력으로 남북은 1973년 12월부터 1975년 3월까지 10차례에 걸쳐 '남북조절위 부위원장 회의'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서해 공해상 북한 포함에 의해 우리 어선이 피격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북한은 남침용 땅굴까지 발견된 상황에서도 대화를 위한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 등을 고집했다. 남측에서도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 벌어지면서 혼란이 가중됐고, 악화일로를 걷던 남과 북의 역사적 대화는 1975년 3월 회의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정부는 지난해 5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사료를 공개한 바 있다. 이번이 세 번째다. 앞서 1976년 8월 북한의 '판문점 도끼 만행' 직후 험악한 분위기 속에 남과 북이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하는 내용이 담긴 자료가 공개될 당시 이보다 선행된 7·4 공동성명 및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대북 접촉 내용도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당시 예비심사 등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비공개 결정이 났다. 이후 통일부는 추가 검토·협의를 거쳐 공개 범위를 정립했고, 이번에 관련 내용을 공개한 것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남북회담 사료 공개는 통일부 훈령에 따라 회담 공개사업을 정책화하고 제도적으로 지속해 나간다는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국민의 알 권리와 대북 정책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문서 공개를 계속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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