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사라졌다고?”…단역배우들 울리는 ‘새 고충’ [조·단역의 세계③]

장수정 2023. 7. 6. 11: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막말 등 사라졌지만…여전히 눈치 보느라 바쁜 단역배우들

“10년 전 이맘때 KBS 드라마 대본 리딩실을 기쁜 마음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복도에서 낯선 사내가 뒷덜미를 붙잡고 골방에 끌고 갔다. ‘내가 드라마 제작 회사 대표인데 잠깐 해외에 출장 갔을 때 너희 같은 놈들을 감독 마음대로 캐스팅해서 열이 뻗친다’고 하더라. 그리고서는 나의 손때 묻은 대본을 그 자리에서 뺏더니 ‘나중에 잘돼서 다시 와’라고 하는데 내 역할은 나중에 보니 모 아이돌이 하더라.”


배우 허정민이 과거 드라마 캐스팅과 관련해 제작사로부터 ‘갑질’을 당했다며 폭로한 글의 일부 내용이다. 막무가내로 캐스팅을 취소한 것은 물론, 골방으로 배우들을 불러 험한 말을 내뱉으며 상처를 준 제작사 대표의 만행에 네티즌들은 ‘대체 누구냐’, ‘지금은 잘 돼서 다행’이라며 분노를 표했다.


ⓒ픽사베이

과거에는 제작사 대표는 물론, 현장에서 조, 단역 또는 보조출연자를 통솔하는 일명 ‘반장’들의 ‘갑질’이 만연했다. 큰소리는 기본, 욕설까지 섞어가며 지시를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10년이 넘게 드라마, 영화 촬영 현장을 오가며 조, 단역 배우로 활동 중인 한 배우는 “그 글을 보고 ‘예전엔 그랬지’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막무가내식’ 갑질은 사라진 분위기”라고 말했다.


물론 작은 배역이라도 따낸 뒤 기뻐하던 것도 잠시, 작품이 자체가 무산되거나 연기되는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출연이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시 또는 막말을 일삼던 분위기는 완화되고 있다.


그렇다고 ‘눈치 보는’ 분위기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수의 단역배우들이 최근 캐스팅 디렉터들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커지면서 ‘새로운 유형의 고충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캐스팅 디렉터는 드라마 또는 영화의 캐스팅을 담당하는 전문가로, 주연부터 단역까지. 다양한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섭외하는 것을 주 업무로 삼고 있다. 과거에는 조연출 등이 오디션 통해 직접 배우들의 프로필을 받고 오디션을 진행했다면, 이제는 전문 인력에게 그 역할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캐스팅 디렉터들은 존재했으나, 최근 영화, 드라마 업계에서 캐스팅 디렉터에게 캐스팅을 전담하게 하는 경우도 늘어나면서 이들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큰 규모의 오디션이 개최되지 못했고, 이에 캐스팅 디렉터들의 역할이 더욱 커지기도 했다.


물론 캐스팅 디렉터들의 남다른 안목으로 ‘잘 된’ 캐스팅이 이뤄져 작품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나. 애플TV플러스 ‘파친코’ 통해 단번에 글로벌 스타가 된 배우 김민하 역시 그의 프로필을 본 캐스팅 디렉터에게 ‘해보지 않겠냐’라는 제안을 받은 뒤 오디션에 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여러 단역배우들은 최근 일부 캐스팅 디렉터들이 연기 학원 운영을 병행하고 있는데, 이것이 자칫 공정성을 해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하고 있었다.


한 10년 차 단역배우는 “대학을 다니면서도 캐스팅 디렉터들을 만나기 위해 학원을 다시 다니는 것을 고민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들이 운영하는 학원에 다녀서 눈에 띄는 것이 하나의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어쨌거나 단역배우들 사이에선 ‘학원 수강생이 되거나 그 학원의 선생님이 되는 방법이 아니면, 선택을 받을 수 없다’는 대화들이 오가고 있다”고 말했다.


캐스팅 디렉터들에게 지불하는 수수료에 대한 불만도 없지 않았다. 제작사에서 지급받는 출연료 중 일부를 캐스팅 디렉터가 수수료 명목으로 떼가게 되는데, 최근 캐스팅 디렉터를 반드시 거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불필요한 중간 유통업자가 더 생긴 느낌’이라는 지적이 나오곤 하는 것.


또 다른 5년 차 단역배우는 “보통 30% 정도를 떼가는데, 회당 30만원의 출연료를 받아서 수수료까지 떼고 나면 허탈할 때가 있다. 그리고 일부 캐스팅 디렉터들의 경우 30%가 넘는 금액을 떼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제작사에, 캐스팅 디렉터들까지. 직접적인 갑질은 없지만, 다음 캐스팅에 영향이 있을까 조심스러운 단역배우들 입장에선 ‘눈치를 볼 일만 더 늘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한 3년 차 단역배우는 “촬영 시간이 오버되면 회차를 넘기거나 아니면 그에 맞게 출연료를 더 지급하는 게 맞다. 그런데 캐스팅 디렉터도 제작사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전달을 하지 못해 결국 나만 그 돈을 못 받게 된 적이 있다. 문제 제기를 하면 불이익이 있을까 하지 못했지만, 중간 다리 역할을 해 주는 이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 줄 필요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