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이름보다 트로이 유적지로 유명한 곳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2023. 7. 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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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차낙칼레, 이곳이야말로 튀르키예

[김찬호 기자]

며칠 간의 이스탄불 일정을 마치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튀르키예는 넓은 국토를 주로 버스를 통해 연결하고 있습니다. 철도 교통은 제한적인 편이죠. 저도 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잠시 이즈니크에 들렀다가 차낙칼레(Canakkale)로 향했습니다. 중간에 예약한 버스편이 취소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이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큰 버스와 작은 미니버스를 갈아타며 작은 마을과 도시를 경유하는 여행이 생각보다는 재미있었습니다.
 
 이즈니크로 향하는 미니버스
ⓒ Widerstand
차낙칼레라는 도시의 이름은 그리 유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차낙칼레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한 시간여를 달리면 나오는 유적의 이름은 너무도 유명하죠. 이곳에 고대 그리스의 도시, 트로이의 유적이 있습니다. 
트로이는 무엇보다 트로이 목마와 그 목마가 사용된 트로이 전쟁으로 알려져 있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자 헬레나를 납치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된 전쟁이었죠. 10여 년간 이어진 전쟁 끝에 그리스는 목마를 남겨두고 퇴각합니다. 트로이는 이 목마를 승전의 상징으로 여기고 성 안으로 들였지만, 목마 안에 숨어있던 그리스군이 습격해 트로이가 멸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전쟁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호메로스가 지은 <일리아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멸망한 트로이의 후예가 로마를 건설했다는 설화도 있죠. 사실 트로이의 후예가 등장하는 건국 신화는 유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차낙칼레 시내의 트로이 목마
ⓒ Widerstand
오랜 기간 트로이라는 도시는 그 실체가 불분명했습니다. 트로이가 어디에 있었던 도시인지도 알 수 없었죠. 그러니 당연히 트로이 전쟁이 실제 있었던 역사인지, 신화에 불과한지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트로이의 실체가 확인된 것은 1871년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에 의해서였습니다. 프랭크 캘버트(Frank Calvert)가 이 지역이 트로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목하자, 그와 함께 발굴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땅 속에 묻혀 있던 트로이가 세상에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슐리만은 훈련받은 고고학자는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오래된 물건을 좋아하는 호고주의(好古主義)에 가까운 사람이었죠. 당연히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졌을 리 없습니다. 트로이 유적 안에 있던 여러 유물이 기록도 없이 발굴되고 훼손되었습니다.

특히 슐리만은 발굴 과정에서 유물을 조작하려 한 혐의도 짙습니다. 자신이 트로이라고 생각한 지층을 발굴하기 위해 다른 층을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슐리만이 지목한 지층은 그리스 신화 속 트로이가 아니었죠. 오히려 그가 파괴한 지층이 그리스 신화 속 트로이로 드러나면서 후일 유적의 실체 규명에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트로이 유적
ⓒ Widerstand
하지만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로, 트로이의 역사적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후 여러 차례 과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신화가 역사적 사실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았습니다. 트로이 전쟁은 기록된 것만큼 대규모의 전면전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큰 규모의 전쟁 흔적이 발굴 과정에서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오히려 트로이라는 도시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트로이는 그리스 신화 속 트로이 왕국보다 더 오래 전부터 있었던 대도시였고, 트로이 전쟁 이후에도 부유한 무역 거점이었습니다. 트로이 유적에는 이 오랜 기간에 걸친 도시의 유적이 층층이 남아 있었습니다.
 
 트로이 유적
ⓒ Widerstand
트로이가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로 튀르키예의 고대사를 상징한다면, 반대의 유적도 차낙칼레에는 있습니다. 이번에는 차낙칼레의 북쪽으로 올라가면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겔리볼루(Gelibolu)라는 도시가 있죠. 
겔리볼루의 옛 이름은 갈리폴리(Gallipoli)입니다. 이곳은 1915년, 세계 1차대전 과정에서 '갈리폴리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고 이스탄불로 진격하고자 했습니다. 오스만 제국군은 이를 막아내야 했죠.

1차대전에서 결국 패전한 오스만 제국이었지만, 이 전투에서만큼은 오스만 제국군이 큰 활약상을 보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상륙 작전을 포기해야 했죠. 특히 영국군과 함께 동원된 호주와 뉴질랜드군이 아주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두 나라는 이 전투가 시작된 4월 25일을 안작 데이(ANZAC Day)라는 국가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죠.

1차대전 과정에서 주변국 식민지를 대부분 상실한 오스만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지역의 본토는 수호할 수 있었죠.

이 전투를 이끌었던 사람이 케말 파샤, 곧 아타튀르크입니다. 그는 이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장군이 되었고, 곧 오스만 제국군 최고의 실력자로 성장하죠. 1차대전 패전 후 그는 튀르키예 독립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전쟁 끝에 독립한 튀르키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다르다넬스 해협
ⓒ Widerstand
차낙칼레는 트로이라는 과거의 도시가 잊혀 땅에 묻힌 곳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갈리폴리 전투로 케말 파샤라는 인물이 튀르키예 현대사의 중심으로 떠오른 공간이기도 했죠. 과거의 유적을 품은 땅이면서, 동시에 현재가 태어난 땅이었습니다. 
굳이 먼 유적까지 찾아가지 않더라도, 차낙칼레 시내에는 트로이 유적에 관한 조형물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갈리폴리 전투를 기념하는 박물관이나 전시관도 여럿 볼 수 있었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공간입니다.

트로이 전쟁과 갈리폴리 전투. 고대 그리스 문화권과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 각자의 색이 짙은 두 문명은 차낙칼레라는 도시에서 만나고 있었습니다. 무너진 고대 그리스의 도시 위로 흩날리는 붉은 튀르키예의 국기. 어쩌면 이곳이야말로 아나톨리아라는 땅, 튀르키예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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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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