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가치외교, 레알폴리틱 그리고 국익

2023. 7. 6.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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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진 전 주미대사
우리 외교에 가치를 강조하는
경향 커졌지만 실리 희생되는
상황 쉽게 초래할 수 있어

지정학적 상황 복잡한 나라는
가치외교보다 레알폴리틱, 즉
현실 정치의 중요성이 강조돼

두 외교 형태는 명분과 실리의
싸움이 되는데 중견 국가에선
실리도 중요하므로 가치·실리
모두 포함하는 국익 추구해야

최근 우리 외교에 가치외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미국 일본과 외교전략을 동일시하면서 가치를 강조하는 경향이 커졌다. 개인의 자유, 법의 지배, 복수정당 민주주의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남북분단 상황을 볼 때 가치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북한이 우리처럼 개인의 자유 등 가치를 중요시하면 남북문제는 대부분 없어지고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가치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경우가 많다. 또 외교 명제로 사용할 때 가치는 절대적 명제가 된다. 가치를 위해 외교를 해야 한다. 그렇지만 실리가 희생되는 상황을 쉽게 초래할 수 있다. 이는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 미국처럼 초강대국이 사용할 수 있는 외교 수단이다. 또 일본처럼 지정학적 선택에 의해 미국과 운명을 같이하는 나라는 가치외교를 선택할 수 있다.

가치외교에 반대되는 외교 용어가 레알폴리틱, 즉 현실 정치다. 레알폴리틱에서 가치는 절대적 명제가 아니라 성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특히 지정학적 상황이 복잡한 나라에서는 가치외교보다 레알폴리틱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십자군전쟁이나 종교전쟁은 가치외교의 대표적 사례가 된다. 중세 종교국가에서 유행하던 외교다. 그러나 지정학적 상황이 복잡해지면 외교 형태도 변한다. 구교를 신봉하는 프랑스의 재상인 리슐리외는 신교를 따르는 국가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레알폴리틱으로 국익을 추구했다.

레알폴리틱은 비스마르크가 적극 활용했고, 헨리 키신저도 자주 사용했다. 사상적으로는 동양의 한비자와 서양의 마키아벨리가 대표한다. 이들은 전쟁이라는 극한적 투쟁이 계속되던 시기에 살면서 가치보다는 현실을 중시하는 방법으로 질서를 만들어 나가자고 했으며, 지도자 입장에서 나라를 다스릴 때 현실 정치에 필요불가결한 지도력의 요소를 3가지로 나열했다. 마키아벨리는 “법, 사자의 힘, 여우의 꾀”를 주장했고, 한비자는 “법, 영향력의 개념인 세(勢), 통치술의 개념인 술(術)”을 주장했다. 레알폴리틱에는 두 번째 요소인 힘, 세가 중요하다.

한비자의 세는 사자의 힘과 다르다. 마키아벨리의 사자의 힘은 지도자가 적이나 신하들의 배반에 대해 사용하는 즉각적 힘이다. 그러나 한비자의 세는 전략적 흐름의 뜻을 포함한다. 그래서 즉각적 행동은 이미 뒤늦은 것이 된다. 세, 즉 흐름을 파악해 미리 작용을 해서 미래에서는 저절로 이뤄지기를 기다리자는 무위(無爲)철학이 포함돼 있다.

세의 개념에 대해선 중국 문명을 잘 알고 있는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도 그의 책, ‘중국(On China)’에서 언급하고 있다. “서양의 역사관은 그들의 역사적 흐름을 악한 것에 대한 승리 또는 과거로의 후퇴에 대한 승리의 과정으로 다룬다. 중국의 전통적 역사관은 다르다…. 그들은 역사의 흐름에서 최선의 선택을 조화에서 찾는다. 전략과 정치력의 발휘는 상대방과의 투쟁적 공존을 이루는 데 집중돼 있다. 목표는 상대방을 약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잠재적 세(勢) 또는 전략적 위치를 강화하는 것에 있다.”

세의 중요성은 중국 전국시대에 신도(愼到)에 의해 강조됐다. 그는 “용(龍)도 구름(勢)을 잃으면 지렁이와 같아진다”라고 주장했다. 인간 사회에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숨겨진 전략적 흐름인 세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예를 들면 칭기즈칸은 13세기 몽골에서 태어나서 몽골이 가진 숨겨진 세를 발견하고 이를 규합해 세계를 지배하는 용이 됐다. 그러나 그가 21세기 몽골에서 태어났다면 무엇을 하든 용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13세기 기마부대와 활의 숨겨진 힘을 가진 몽골의 세가 21세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에서도 제5장 전체가 숨겨진 전략 세에 관한 설명이다. 세를 파악하고 이용하면 백전불태가 된다.

가치외교와 레알폴리틱은 결국 세가 추구하는 국익이라는 대명제에서 명분과 실리의 싸움이 된다. 가치외교는 명분을 부여하기 때문에 외교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특히 미국과 같은 강대국에는 그렇다. 그러나 중견 국가에는 명분 못지않게 실리가 중요해진다. 우리는 지금 복잡한 지정학적 구조와 상황에 처해 있다. 가치와 실리를 모두 포함하는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 명분과 실리의 싸움, 우리는 병자호란 때 이런 상황을 처절하게 경험했다. 불필요하게 가치와 실리의 싸움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최영진 전 주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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