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 위험’ 무시한 산지 개발 현장, 산사태 불렀다
아찔했던 산사태 현장 점검 가보니
지난 4일 오전 10시20분, 경북 영주시 상망동 장미마을아파트의 뒤편은 무릎 아래로 온통 흙색이었다. 아파트 외벽은 무릎 높이까지 토사가 덮쳤던 자국이 남았고, 아스콘 바닥에는 씻어내지 못한 흙탕물이 말라붙었다. 지난달 29일 오후 11시쯤 이 아파트와 연접한 산 위 상망지구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산사태가 남긴 상흔이다.
당시 이틀간 340㎜의 폭우가 쏟아지며 공사 현장 동쪽 사면이 무너져 내렸다. 쏟아진 토사가 공사 현장 외벽을 부수고 아파트 단지로 들이치면서 주차돼 있던 차량 5대를 덮치고 1층 입구까지 밀려 들어왔다. 600㎜ 너비의 농수로에 쌓인 토사가 배수를 막으면서 사면 아래 논 전체도 침수됐다.
4일 현장에선 굴착기 2대가 분주하게 산사태의 흔적을 정리하고 있었다. 쏟아져 내린 토사는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재해전문가인 정규원 산림기술사(박사)는 “물을 많이 머금은 땅이 무르게 변해 힘이 없는 상태”라며 “산지 개발이 이뤄지면서 물의 흐름이 바뀌고 예측할 수 없어지는 ‘수계 교란’이 일어난 것”이라고 우려했다.
장미아파트 주민 임모(50)씨는 “20년 넘게 살면서 집중호우가 내린 적도 많았지만 이렇게 물이 넘치고 산사태까지 난 건 처음”이라면서 “오후 7~8시쯤부터 배수로가 막혀 공사 차량이 오가더니 11시에 산사태가 발생해 차가 뒤집히고 피해가 커졌다”고 말했다.
산사태의 발단이 된 공사 현장은 GS 건설이 시공 예정인 ‘자이 아파트 대단지 개발 현장(영주상망지구자이)’이다. 764세대가 입주할 아파트를 만들고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면적 2만2156평(7만3242㎡)만큼 산을 깎았다.
산지를 깎아 평평하게 조성한 현장은 1994년 12월 120세대를 기준으로 준공된 5305㎡ 면적의 장미마을아파트 배수 체계에 의존하고 있었다. 장미아파트 서쪽에 있는 콘크리트 축대에 가로세로 60㎝ 남짓한 사각형 구멍이 있다. 과거부터 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을 장미아파트의 배수관로로 내보내는 통로다. 시행사는 이곳으로 물이 모여 빠져나가는 주력 침사지를 조성했고, 집중 호우 때 고이는 물을 흘려 내보내는 우수관로로 활용했다.
그러나뻗어 나간 배수로는 손바닥 두 뼘만 한 지름의 관에 불과했다. 관로가 꺾이는 지점에선 관과 관 사이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붕 뜬 곳도 보였다. 배수관로의 끝은 단지 안에서 끊긴 채로 검은빛의 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해당 택지 조성을 맡은 시행사 엘케이 파트너스 주식회사의 정윤석 대표는 “우수관로를 분산 배치해뒀는데 제일 주력 부위에 물이 쏠렸다”며 “예상보다 비가 많이 내려 장미아파트 우수관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례가 산지 개발 과정에서 산사태 등 자연재해 위험에 충분히 대처하지 않은 채 공사를 진행해 일어난 인재라고 지적했다. ‘재해 위험성 검토’와 ‘재해 영향 평가’가 요식 행위로 진행되면서 실질적으로 자연재해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재해 위험성 검토는 산지를 개발할 때 개발지역을 포함한 상부와 하부의 유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사태 위험성을 검토하는 제도이다. 기후위기가 심화하면서 강우의 빈도와 세기가 예측 불가능해지자 산사태 등의 재해 위험성을 고려한 개발 허가 기준을 마련하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산사태를 좌우하는 것이 ‘물’인 만큼, 배수관 재료, 통수단면적, 저류 등의 배수로 체계도 위험성 검토 대상이 된다.
영주시청 관계자는 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장미아파트 우수관로가 영주시 배수관로와 이어져 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면서 “(산사태) 당시 토사까지 쏟아지면서 배수관로를 막아버린 것 같다”고 했다. 감독기관인 영주시청 역시 재해 위험 가능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정 박사는 “재해 위험성 검토는 위를 막고 아래는 터지지 않도록 해 토사가 없는 물이 하천까지 안전하게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라면서 “위험성 검토 분석에 장미아파트 우수관로에 대한 평가도 들어갔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 박사는 또 “침사지가 만수가 되면 넘쳐 흐르는 물의 양이 많을 텐데 아파트 관로가 감당할 수 있는 수량과 맞지 않는다”며 “사전에 아파트의 배출구라도 제대로 확인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만약 토사량이 조금 더 많았거나 토사가 덮친 방향이 몇 미터만 달라졌어도 인명피해 등 큰 참사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며 “이번 사례는 산지 개발 공사 현장들이 산사태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함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번 산사태에 대해 시행사 측은 “현재 장마철 2차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추가 피해 방지에 주력하고 있다”며 “예방과 보상을 위해 주민들과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영주=이정헌 기자 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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