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에 빨간펜 여전한데...'페이퍼리스' 선언, 20년전과 다른 이유

최은경 2023. 7. 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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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모비스 직원들이 자율좌석제로 운영 중인 스마트오피스에서 화상 회의를 진행하는 모습. 연합뉴스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문서를 통한 보고·회의를 지양하겠다. 모든 보직장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달라.”

지난 3일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이 임직원들에게 보낸 e메일 내용이 알려지면서 기업의 ‘페이퍼리스(Paperless, 종이 없는)’ 문화에 다시 재계의 관심이 쏠린다.

한 부회장은 이날 “대부분의 업무 환경이 디지털화했음에도 아직 회의 자료를 종이로 출력하고, 보고 때도 대면해 보고서로 내용을 확인하는 관행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다”며 “메신저나 이메일을 통해 신속하게 의사결정하고, 회의실에 갖춰져 있는 디지털 장비를 활용해 일하는 습관을 만들어 나가자”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지난달부터 추진해온 ‘노 페이퍼 워크플레이스’ 캠페인에 대한 참여를 최고경영자(CEO)가 다시 한번 유도한 것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페이퍼리스는 지난해 9월 발표한 환경경영전략 실행 방안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업무 효율화에서 기업문화 변화로


기업들 사이에서 종이 사용을 줄이자는 캠페인이 벌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LG전자 등 많은 기업이 업무 효율화를 위해 전자문서 시스템을 도입해왔다. 이즈음에 전자결재 방식이 크게 확산했다.

회의 문화도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A대기업 임원은 “몇 년 전만 해도 임원회의 전 회의안을 종이로 출력해 자리마다 한 부씩 뒀지만 요즘엔 주로 개별 모니터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B대기업 임원도 “개인 태블릿에 띄운 회의자료를 수정해 바로 공유하는 문화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고 전했다.

한종희 삼성전자 DX부문장(부회장)이 지난 3월 21일 서울 중구 '마실'에서 열린 '비스포크 라이프' 미디어데이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연합뉴스


하지만 보고 때는 여전히 종이를 주로 쓴다는 게 기업 관계자들의 말이다. 자세한 수치나 도표 등을 함께 보면서 설명해야 할 때가 많아서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종이 사용은 줄어드는 추세다. 한국제지연합회에 따르면 인쇄용지 생산량은 2017년 274만2297t에서 지난해 242만166t으로 줄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시 기업들이 종이 없는 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강화와도 관련 있다. 한 부회장 역시 “지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동참”을 주문했다. 환경 보호를 위한 활동 중 하나라는 얘기다. 여기에 유연한 기업문화 조성이라는 목적이 더해졌다.

SK이노베이션 등 SK그룹 주요 계열사는 내부에서는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지 않고, A4 용지 한장으로 보고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출장 결재 때에도 정해진 품의서 양식 없이 이메일을 통해 출장 계획과 일정을 남긴 뒤 허가를 받으면 된다. 이 회사 관계자는 “기업문화 혁신을 가로막는 요인을 조사했을 때 불필요한 회의와 보고에 대한 불만이 많이 나왔다”며 “CEO 역시 종이 자료가 아닌 온라인상 PDF 자료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김주원 기자

“비용 절감 효과는 크지 않아”


재택근무 확산, 자율좌석제 도입 등도 페이퍼리스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C기업 임원은 “나 외에 프린터 쓰는 직원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종이가 떨어져도 내가 채워 넣는다”며 “이런 방향으로 계속 가면 정말 종이 없는 회사가 될 수도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종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D대기업 임원은 “아무래도 연령대가 높은 임원은 보고서를 출력해 가져오길 원하고, 빨간 펜으로 그으면서 본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기업 관계자들은 “경기 불황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기업의 경우 종이 절약이 비용 절감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전했다.

김광현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는 “페이퍼리스 문화는 기업들의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움직임인 동시에 기업문화 변화를 위한 상징적 시도로 볼 수 있다”며 “다만 실제 기업문화 변화로 이어지려면 단순히 종이량을 줄인다는 메시지보다 좀 더 상호적이면서 형식보다 내용에 초점을 맞춘다는 방향성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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