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곡기 끊은 스님의 '아름다운 보시'

박환옥 2023. 7. 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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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스님 입적 1주기에 열린 작은 축제... 그가 남긴 더 큰 선물은?

[박환옥 기자]

 연관스님의 생전 모습
ⓒ 세상과함께 제공
 
1년 전, 연관스님은 자기 병이 깊다는 것을 알고 모든 물과 곡기를 끊고 입적하셨다. 그 전에 원고료와 주변에서 제자들과 신도들이 준 돈을 모두 사단법인 '세상과함께'에 기부하셨다. 스님의 제자들은 여기에 장례식 때 모인 부의금까지 보탰다. 1억 원이 넘는 후원금으로 미얀마 따이찌라는 오지마을 '고아사원 학교'에 아이들이 숙식하며 배울 수 있는 기숙사를 세웠다.

내전이 심해서 기숙사 완공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세상과함께는 '붓다숲'이라는 기숙사 이름을 지어 작은 현판에 이런 글을 써서 미얀마에 보냈다.

"연관스님(1949~2022은 수행을 잘하신 한국의 비구스님이셨습니다. 스님의 유지를 제자들이 받들어 미얀마 따이찌 학교에 붓다숲 기숙사를 설립했습니다. 많은 아이들에게 스님의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어 뛰어놀고 쉬는 붓다숲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년 넘게 이어지는 미얀마 내전. 곳곳에서 전쟁고아가 속출하고 있고, 몸을 의탁할 데 없는 소수민족 아이들이 사원에 모여 살고 있다. 이런 힘든 여건 속에서도 불교도들의 시주가 끊이지 않고 있고, 1000여 명의 아이들이 굶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불교가 민중 속에서 깊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한 까닭은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 생명이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 수천, 수만, 아니 기숙사가 사라질 때까지 수십만 명의 어린 생명들에게 주고 간 특별한 선물을 추앙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눈이 부실정도로 명료하며 꾸밈이 없고 소박한 한 인간의 삶에서 풍기는 향기, 기숙사 건립을 계기로 문득문득 떠오르는 연관 스님의 삶을 추억하기 위해서다.
   
 미얀마 따이찌라는 오지마을 ‘고아사원 학교’에 아이들이 숙식하며 배울 수 있는 기숙사가 설립됐다.
ⓒ 세상과함께 제공
 
연관스님은 1949년, 지리산 하동 섬진강 진교에서 태어나셨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했던 스님은 스무 살에 상주 남장사로 출가해 교학에 힘쓰셨다. 직지사 관응 큰스님 회상에서 공부하시고 잠시 직지사 강사를 역임하시다가 선원에서 정진하셨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이 돼 후학들을 양성하셨고 경전과 많은 어록을 번역하셨다.

'금강경 간정기' '선문단련설' '선관책진' '죽창수필' '아미타경소초' '왕생집' '석정스님 문고집' '학명집' '용악집' 등이다. 특히 운서주굉선사의 '죽창수필'은 승속을 떠나 종교와도 관련 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40대 중반에 큰 병이 와서 40일 단식 후 '몸이 나를 다시 일으켰다'고 하시면서 바랑 하나를 지고 백두대간과 4대강, 낙동정맥을 걸으시기도 했다. 달 밝은 밤이면 지리산 정령치, 노고단에서 묘향대로 올라가셨다. 새벽이슬이 내릴 때까지 걸으시면서 다닐 때 "스님은 왜 항상 혼자 걷습니까?"라고 여쭌 적이 있는 데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왜, 혼자야? 항상 그림자가 따라오는데."

병이 완쾌돼 제방선원에서 정진하시면서도 늘 경전번역에 주력하셨다.
 
 연관스님의 생전 모습
ⓒ 세상과함께 제공
  
스님과의 인연은 40년이 됐다. 젊은 시절, 스님께서 번역하신 '죽창수필' '선문단련설'을 바랑에 넣고 다녔다. 운수행각(스님들이 발길 닿는대로 이리저러 떠도는 일) 중에 나를 곧추세우고 그릇되지 않게 보살펴준 책이었다. 지리산 약수암에 계실 때 찾아뵈면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경전을 보시던 모습이 선연하다.

스님은 겉치레가 없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으로 지내셨을 때에도 졸업생 축사를 단 두 마디 말로 끝낼 정도였다. 또 무엇이든지 물어보면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주셨고, 모르는 질문에는 '나도 잘 모르겠네!'라고 툭 던지듯 하셨다.

지난 여름이었다. 코로나가 걸려서 병원에 가셨다가 항상 등쪽에 묵직한 것이 잡힌 것이 꺼림칙해서 진료를 하셨는데 암덩어리였다. 그 뒤부터 급격히 몸의 쇠락했다. 내가 이를 걱정하자 스님께서는 "이삿날을 잡아 놓은 것 같다"고 말하면서 허허허 웃으셨다. 또 "개미 한마리가 베개 위를 기는데 왜 그리 소중하게 보이는지!"라고 말하시며 봉암사 동암을 나오셨다.

절친인 수경스님과 부산 관음사에 들어가서 물과 곡기를 끊고 임종기도를 하셨다. 평소 스님을 따르던 젊은 수좌가 임종시자가 돼 수경스님과 함께 지켰는데, 마지막으로 수경스님 손을 잡고 아미타불을 염송한 뒤 10분 후에 적멸에 드셨다. 2022년 6월 15일이었다.

손 써볼 겨를도 없었지만 입적하시기 직전 며칠 동안, 연관스님의 단식은 단호했다. 음식을 넣지 말라했고, 물도 끊었다. 자신에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조용히 응시하며 맞겠다는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가까운 도반과 지인들이 떠날 때에는 '잘 가시요!'라면서 다시 또 볼 것처럼 손을 흔들었고, 묵은 수첩과 메모지를 보면서 몇 가지의 물건을 나누셨다.
  
 연관스님의 생전 모습
ⓒ 세상과함께 제공
 
임종시자와 이런 농담도 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정진을 안 한다고 막 뭐라고 하면 안돼!"
"멧돼지가 마당을 파헤쳐서 암자 주변에 폔스를 쳤는데 누가 살아도 괜찮을거야!"

스님에게 죽음은 삶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육신의 에너지는 소멸돼 가지만 마음은 평소보다 더 여유롭고 평온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조선 초기 봉암사에서 수행을 하셨던 함허득통 선사를 흠모했던 연관스님은 생전에 지인인 이철수 판화가에게 봉암사 동암에 부칠 '함허당'이라는 현판을 써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이철수 판화가는 연관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현판을 사후에 헌정하고 손수 편액을 동암에 달아주셨다. 스님의 지인들은 슬퍼했지만 이런 일상적인 인연이 계속됐다.

스님은 마지막까지 육신에서 수분이 다 빠져나가는 것을 무섭게 관찰하셨던 용기있는 수행자셨다. 통도사에서 화장한 뒤 영롱한 사리가 나왔지만 수경스님께서 "이것은 연관의 뜻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고, 스님의 흔적은 섬진강에 뿌렸다.

스님께서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지난 6월 14일에 하동섬진강 송림에서 작은 축제가 열렸다. 스님께서 즐겨 부르시던 노래가 불려졌다. 또 스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만든 '놓아 버려라'(삼인 출판) 이라는 책도 나왔다. 그리고 곧이어 미얀마 타이찌라는 오지에는 소수민족, 전쟁고아 등 1000명의 아이들이 숙식할 수 있는 기숙사가 완공됐다.
  
 미얀마 따이찌라는 오지마을 ‘고아사원 학교’에 세워진 기숙사.
ⓒ 세상과함께 제공
 
맨땅 위에, 비바람 속에서 웅크리고 자던 아이들의 보금자리가 마련됐다. 비록 그날, 스님은 안 보였지만 섬진강은 유난히 맑았다. 하동 송림숲은 더욱 푸르고, 바람도 시원했다. 연관스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처럼 만나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미얀마 붓다숲 기숙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 모든 평화는 스님과 제자들의 아름다운 보시 때문에 가능했다.

이날 화담 스님은 1주기 추모사를 이렇게 맺었다.

"멋진 수행자이셨고 끝까지 멋지고 부럽게 사셨습니다. 저도 스님처럼만 살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텐데 마냥 부러워할 따름입니다. 스님처럼 멋지고 훌륭한 수행자와 인연이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생에 출가하기를 잘했다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생을 떠나면서 남김없이 1000명의 아이들에게 준 선물도 소중하지만, 나에게는 연관스님이 소소한 일상에서 보여준 삶의 향기가 더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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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의 필자인 박환옥 씨는 (사)세상과함께 이사장인 유연스님의 속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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