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도 아닌데 3개월 전부터 숙소마감... 이런 행사라니
[하수정]
"드디어 간다!"
"숙소 예약이 어렵네요. 혹시 괜찮은 곳 있으면 추천 부탁합니다!"
BTS 콘서트도 아닌데, 행사 3개월 전에 이미 근처 숙소가 모두 마감돼 다른 도시에서 묵으며 출퇴근까지 하는 축제가 있다. 스웨덴의 '알메달렌 정치박람회'다.
▲ 알메달렌 정치박람회 메인 스테이지의 모습. |
ⓒ 알메달렌 공식 페이스북 갈무리 |
1968년 여름, 한 정치인의 휴가에서 시작됐으니 역사가 제법 길다. 스웨덴 전 총리 올로프 팔메의 가족 별장이 있는 고틀란드는 스웨덴에서 가장 큰 섬(제주도의 1.7배)이자 인기 있는 휴양지로 중세시대의 유적이 남아있는 한적한 도시다. 수도 인 스톡홀름에서 비행기로 동쪽으로 40분 정도 걸린다.
당시 교육부장관이었던 팔메는 여름휴가 차 별장에 와 있었다. 유명한 정치인이 왔다는 소식에 주민대표가 찾아와 '사람들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그러자 팔메는 장을 보고 오던 길 영수증에 간단히 메모를 한 뒤 트럭 위에 올라가 연설을 했다. 그곳이 바로 고틀란드주의 주도 비스뷔의 한가운데 있는 알메달렌 공원이다.
팔메가 속한 사회민주당(사민당) 의 정책에 관한 이야기도, 1968년이었던 만큼 미국의 하노이 폭격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있었다.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팔메에게 질문을 하거나 각자의 의견을 나눴고, 공원은 과거 그리스 아고라 같은 토론장이 됐다. 집안 대대로 내려온 여름 별장이 고틀란드에 있는 관계로 매년 여름 이곳을 찾은 팔메는 총리가 된 이후에도 매년 알메달렌 공원에서 사람들을 만나 당의 정책을 전했다.
팔메의 행보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자 팔메가 속한 사민당 내 주요 인사들도 합류했다. 위기감을 느낀 다른 정당 정치인들도 비슷한 시기 알메달렌에 찾아와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속한 정당의 이념과 활동상을 소개하며 지지를 호소하거나 정치적 사안을 두고 논쟁을 펼치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사민당 외의 정당도 알메달렌 공원에 와서 자유 연설을 시작했고 1982년부터는 의회에 진출한 주요 정당이 모두 참여했다.
정당뿐만 아니라 시민단체, 노동조합도
할 말이 많은 곳은 정당뿐만이 아니다. 각종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 다양한 집단 이 알메달렌을 찾아 각각의 주장을 펼치며 시민과 소통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자 1994년 고틀란드 지자체가 아예 알메달렌 주간(Almedalen Week)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위원회를 구성해 관리하며 공식 행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매년 여름, 6월 말~7월 초 사이 의회에 진출한 정당이 모두 참여해 요일별로 하루씩 제비를 뽑아 해당 요일은 그 당이 주인공이 돼 유권자를 향해 저마다의 정책과 비전을 알리고 소통한다. 유권자는 자유롭게 당 대표에게 질문하기도 하고 의견을 나누며 공론의 장으로 삼는다. 스웨덴 의회는 알메달렌이 끝난 이후부터 비로소 공식 휴가가 시작된다.
알메달렌 정치박람회는 올해(6월 27일부터 7월 1일까지)로 55회를 맞으며 더욱 풍성해졌다. 코로나 기간 실시간 중계를 통해 진행했던 터라 규제가 풀린 올해는 다시 사람들을 맞을 준비에 벌써 들뜬 분위기다. 의회에 진출한 8개 정당을 중심으로 각계각층 인사, 시민단체와 비영리단체, 연구소, 학교, 기업, 언론, 일반 시민이 자유롭게 부스를 세워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사람들을 만난다. 알메달렌 주간 내내 5000여 개의 행사가 벌어지고 인구 5만이 조금 넘는 작은 섬 고틀란드에 10만 명 정도가 방문한다고 하니 지역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는 반가운 행사인 셈이다. 정치가 축제가 될 수 있다니 놀랍다.
일전에 알메달렌 정치박람회를 다룬 한 프로그램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다. 사민당 대표가 화폐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며 기술이 주는 편리함과 투명한 세금 징수, 소득 관리 등 여러 장점에 관해 설명했다. 정책과 추진안을 자세히 말하는 중에 현장에 있던 6세짜리 꼬마가 질문을 던졌다.
"저 같은 어린이는 카드를 만들 수 없는데 그럼 어떻게 사탕을 사나요? 나이가 많은 사람 중에도 카드가 불편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현금을 완전히 없애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 지난해 알메달렌 정치박람회 무대에서 중앙당 대표 애니 뢰프가 연설하는 장면. |
ⓒ 알메달렌 정치박람회 페이스북 갈무리 |
토론의 목적은 해답 찾기... 이기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지자체가 알메달렌과 비슷한 시도를 했는데 아직 뿌리내린 행사는 없는 것 같다. 북유럽에서 공부하고 북유럽 기업과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북유럽 사회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토론을 정말 많이 한다. 한국식 토론과 차이점이 있다면 북유럽 토론의 목적은 해답을 찾는 것이지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긴 시간과 노력이 드는 과정이지만 어떻든 해답을 찾아야 끝이 나니 서로를 모욕하고 손가락질하는 소모적인 공격보다는 하나씩 양보해 가며 합의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팔메가 "남들은 우리 보고 달팽이 같다고 하겠지만 나중에 보면 가장 멀리 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오늘의 북유럽 사회가 바로 달팽이의 움직임처럼 지난한 토론의 결과다.
대한민국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민주주의를 쟁취해냈다. 평등보다 위계가, 대화로 합의점을 찾기보다 투사가 돼 싸우는 일에 익숙하다. 하지만 누군들 원해서 투사가 될까? 들어주지 않고 대화하지 않으니 내몰려서 투사가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대화가 민주주의의 시작이고, 대화를 거부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반대다. 각각의 이해관계자가 동등한 위치에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상생의 길을 가길 바라지만 그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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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하수정씨는 북유럽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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