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기독교 버려라” 기독교인 색출 위한 ‘후미에’ 옆 못 길을 걷다

손동준 2023. 7. 5. 15:4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WGN 나가사키 순교지 탐방…스즈타로 감옥터·호쿠바루 순교지 등 참혹했던 현장들 방문
4일 일본 나가사키현 오무라시에서 진행된 '후미에 체험'에서 서우경(연세대 겸임) 교수가 못 길 위를 걷고 있다. WGN 제공


400년 전이었으면 최소 고문을 당했을 상황이었다. 한일연합선교회(WGN·이사장 정성진 목사) 나가사키 순교지 탐방단이 4일 진행한 ‘후미에’ 이야기다. 후미에는 에도막부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고안한 제도다. 막부는 매년 정초가 되면 사람들을 모아 철판으로 된 예수상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예수상을 밟고 욕을 하거나 침을 뱉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잠시라도 머뭇거리거나 밟지 못하는 사람은 체포 후 고문을 받았고 심하면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WGN은 후미에 체험의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예수상 옆에 못 길을 나란히 설치했다. 예수상을 밟지 않으려면 날카롭게 솟은 못 길을 밟아야 했다. 신발을 신고 있었지만 거부감이 들었다. 못 길 바로 옆에 놓인 예수상 위에는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의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 속 대사가 적혀 있었다.

모두 주저하고 있을 때 정성진 목사가 먼저 발을 뗐다. 못 길이었다. 이후에는 하나둘 못 길을 건넜다. 간혹 신발을 벗고 못 길을 밟는 참가자도 있었다. 서우경(연세대 겸임) 교수는 “순교자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기 위해 신발을 벗었다”며 “예상은 했지만 상당히 아팠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당시 크리스천들의 마음을 떠올리며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스즈타로 감옥터에서 참가자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후미에 체험이 진행된 스즈타로 감옥터는 나가사키현 오무라시의 대표적인 순교 유적이다. 15세기 후반 오무라시는 기독교 영주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크게 융성했다. 하지만 에도시대(1603~1868)로 들어서면서 기독교에 대한 금교령이 내려지고 선교사들이 대거 추방됐다. 신앙을 이유로 많은 이들이 감옥에 갇혔다. 스즈타로 감옥에 수감된 인원은 총 131명. 6평 남짓의 대나무로 만든 새장 같은 스즈타로 감옥에 많게는 동시에 33명이 갇혀 지냈다. 비좁은 공간에서 몸을 못 움직이니 피가 안 통해 살이 썩고 구더기가 들끓는 환경 속에서 견뎌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수시로 끌려 나가서 혹독한 고문 끝에 죽음을 맞았다. 수감 당시 11살과 13살이던 남매는 부모가 처형된 후에도 비좁은 감옥 안에서 고통스러운 수감생활을 견뎠다. 그들은 70대 노인이 될 때까지 감옥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또 조선인 두 사람은 감옥에 몰래 참외를 넣어주다가 발각돼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들은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받았지만 거절했고 참수당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스즈타로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리던 스피노라 선교사가 고국 선교부에 보낸 편지에는 참혹했던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이번에 새로 옮긴 감옥에는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의 작은 문이 있지만 자물쇠가 채워져 있습니다. 눈도 비도 피할 수 없는 아주 혹독한 환경입니다. 많을 때는 33명이 함께 있기에 누울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식사는 밥에 소금 정도이고 옷은 세탁할 수도 없고 햇볕에 말리는 것도 금지돼 있습니다. 용변도 감옥 내에서 해결해야 해서 악취가 진동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숨겨주다가 붙잡힌 이들이 화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곧 우리도 화형을 당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올수록 우리는 모두 큰 기쁨과 열기로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처자 이별 눈물바위. 당시 너무 많은 눈물이 흘러서 지금까지도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설화가 이어지고 있다. WGN 제공


1657년에는 숨어서 기도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문을 들은 막부 요원들이 대대적인 그리스도인 색출 작전이 벌인다. 이 일로 603명의 신자가 체포된다. 심문 끝에 7명은 죽고 99명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방면됐다. 20명은 종신형을 받았고 나머지 406명에 대해서는 참수형이 내려지게 된다. 처자 이별 눈물바위는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이들이 가족 친척들과 마지막 이별을 나누며 눈물을 흘렸던 장소다. 당시 너무 많은 눈물이 흘러서 지금까지도 이 바위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호쿠바루 순교지에서 탐방단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WGN 제공


처자 이별 눈물바위에서 가까운 곳에 호쿠바루 순교지가 있다. 오무라 시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의 피가 흐른 곳이다. 참수형이 결정된 406명 가운데 131명이 1658년 7월 27일 이곳에서 처형됐다. 순교자들은 형장에 도착해 조사받은 후 4열로 줄을 지어 무릎을 꿇은 채 차례로 참수형을 당했다. 탐방단은 이곳에서 줄을 지어 무릎을 꿇었다. 임석순(한국중앙교회) 목사의 인도로 진지한 모습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탐방단은 131명의 순교자가 묻힌 무덤으로 이동했다. 몸을 묻은 무덤과 머리를 묻은 무덤이 각각 떨어져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에도 막부가 순교자들의 몸과 머리를 따로 매장한 이유는 죽은 크리스천이 부활할 것을 겁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두 무덤에는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목이 잘린 131인의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기념비. WGN 제공


같은 시기(1627~1632년) 운젠시에서도 많은 이들이 개종을 강요받으며 고문당했다. 운젠지옥은 대표적인 고문 장소다. 이곳에서 막부 요원들은 기독교인들이 기도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을 묶었다. 옷을 벗기고 펄펄 끓는 유황 온천물을 부었다. 칼에 베여 등이 갈라진 채 끓어오르는 진흙 구덩이와 온천물에 던져지고 부모가 보는 앞에서 어린아이를 온천물에 던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머리무덤. 당시 막부는 순교자들의 머리와 몸을 따로 매장했다. 죽은 크리스천이 부활할 것을 겁냈기 때문이다. WGN 제공


WGN은 나가사키 순교자들의 역사를 가톨릭과 개신교 공통의 역사로 해석한다. 김동주(호서대 연합신학전문대학원장) 교수는 “일본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가톨릭이 전래된 것이 아니고 기독교가 전래된 것”이라며 “나가사키에 복음이 전해진 1549년은 종교개혁으로 구교와 신교가 엄격한 분리를 선언하기 50여년 전”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당시는 루터조차도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하고 있을 때”라며 “가톨릭과 개신교의 엄격한 분리는 교회사적으로 보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부터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일어난 일본 크리스천의 수난은 전체 기독교사의 수난으로 이해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5일 히라도문화센터에서 진행된 한일 문화 교류회에서 김하중 장로가 특강을 하고 있다.


한편 탐방 3일째인 5일에는 한일 문화 교류회가 진행됐다. 500여명의 한국 탐방단 외에 150여명의 현지인들이 행사를 찾은 가운데 문화 공연과 특강이 진행됐다. 주중대사와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하중(온누리교회) 장로는 “순교자들은 비참하게 죽었지만 영원히 세상을 이긴자가 됐다”며 “이번 탐방이 신앙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 장로는 “일본 땅을 밟으며 이 땅을 축복하고 만나는 모든 일본 사람들을 축복하자”며 “일본이 과오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일본 교회가 부흥하기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팝페라 가수 김수진 씨가 5일 열린 한일 문화 교류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가사키(일본)=손동준 기자 sdj@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