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산책]장수탕의 선녀는 왜 그림책을 뚫고 나왔을까

김희윤 2023. 7. 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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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나, 예술의전당서 첫 개인전
구름빵·알사탕 등 140여점, 작품세트·체험형 콘텐츠 선보여
아이 눈높이에서 봐야 더 잘 보이는 그림책 전시
구름빵 저작권 분쟁…“창작권, 존중의 문제”

“사랑해!” “보고 싶어.” “나랑 같이 놀래?”

그림책 ‘알사탕’의 동동이는 친구들이 먼저 말 걸어 주길 바라며 혼자 구슬치기를 하는 수줍은 아이다. 새 구슬을 사러 간 문방구에서 우연히 산 사탕 한 봉지, 사탕을 입에 넣을 때마다 상대방의 ‘마음’이 들린다. 아빠의 진심, 반려견 구슬이의 마음, 할머니의 안부까지. 마법 같은 알사탕을 입에 문 동동이처럼 백희나 작가(51)의 캐릭터들이 책 속에서 나와 관객에게 말을 거는 전시, ‘백희나 그림책전’은 마법 같은 구성으로 작가가 창조한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백희나 그림책전’ 포토존에서 백희나 작가가 자신의 책 ‘알사탕’ 주인공 ‘동동이’ 인형 곁에 앉아 활짝 웃고 있다. [사진제공 = 예술의전당]

지난 21일 기자간담회에서 백 작가는 “할머니가 돼서야 전시를 열 줄 알았는데, 예술의전당에서 기획과 제안을 주셔서 큰마음 먹고 (전시를) 결심하게 됐다”며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하지만 제가 받은 사랑을 돌려드리는, 독자를 위한 선물이란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준비했고 결국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두 달 동안 한가람디자인미술관으로 출퇴근하며 전시를 준비했다는 백 작가는 “‘이상한 엄마’에 나오는 구름은 오늘 아침까지 작업했다”며 “두 달 만에 끝낼 수 없는 작업량이었지만 그래도 아프지 않고 잘 마무리 했다”고 말했다.

‘아동문학계의 노벨상’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상을 받으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대표작 ‘구름빵’(2004)부터 ‘달 샤베트’ ‘장수탕 선녀님’ ‘알사탕’ ‘연이와 버들도령’까지 창작 그림책 11권 속 이야기를 담은 140여 점의 작품 세트와 체험형 미디어 콘텐츠를 선보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CG가 일반화되고 AI 캐릭터들이 유명 브랜드의 모델로 활약하는 시대지만 작가는 모든 작업을 종이, 섬유, 스컬피(점토와 유사하지만 열을 가하면 딱딱하게 굳는 조형재료)를 사용해 손수 제작한다. 골판지나 폼보드에 벽지, 사진을 붙인 세트 등 소품도 직접 만드는 그는 “이번 전시가 단지 그림책 속 원작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시 작품들 자체로 완성도가 높길 바랐다”며 “20년 가까이 된 ‘구름빵’ 종이 인형부터 ‘연이와 버들 도령’ 나무 그루터기까지 그간 보관하고 있던 모든 캐릭터와 소품을 꺼내 전시 형태로 만들기 위해 세트를 추가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첫 작품부터 지금까지 작업한 모든 결과물을 단 한 점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작가는 덧붙였다.

백희나 작가의 '이상한 엄마' 작품 중. [사진제공 = 예술의전당]

작품 전시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구성됐다. 관람객으로서 아이들 눈높이로 봐야 더 잘 보이게 전시작을 낮게 설치된 점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특히 ‘꿈에서 맛본 똥파리’는 작품을 아예 바닥에 전시해 아이들이 어른 관객의 방해 없이 마음껏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12가구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달 샤베트’ 아파트 세트는 그 규모와 디테일이 감탄을 자아낸다. 생생한 집 곳곳의 풍경에는 두 아이를 키우며 식탁에서 작업했던 작가 자신의 체험과 당시 집안 모습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전시는 단순한 세트에 그치지 않고 각양각색 삶의 이야기를 품은 입주민들 모습을 보다 가까운 시선으로 보여준다. 각 가구마다 CCTV를 설치해 세트 좌우 모니터를 통해 그 속에 담긴 주민들의 표정, 삶, 그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게 구성한 점이 돋보인다.

‘장수탕 선녀님’은 실제 목욕탕처럼 연출돼 관객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실물 사이즈의 선녀님이 요구르트 마시는 모습은 마치 내가 이야기 주인공 덕지가 돼 할머니를 만난 느낌까지 연출한다. 흔히 날개옷 차림에 고운 모습의 선녀를 떠올리지만, 백 작가는 냉탕에서 만난 선녀님을 우리가 옛이야기 그림책에서 보던 선녀와는 너무도 딴판인 새로운 캐릭터로 창조해냈다. 깊게 파인 주름과 풍만한 체형은 선녀님보단 동네 할머니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할머니 옆으로는 잠시 쉴 수 있게 앉는 공간도 마련됐다.

백희나 작가가 자신의 작품 '장수탕 선녀님'에서 실제 사이즈로 제작된 선녀님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제공 = 예술의전당]

실감 미디어 콘텐츠로 새롭게 구현한 ‘연이와 버들 도령’ 영상은 고립과 단절의 시간을 딛고 일궈낸 연이의 성장 이야기를 감성적인 이미지들로 새롭게 보여주며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남다른 각오로 임했다는 작가는 “그림책은 한 아이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기에 무조건 잘해야 하는 과업”이라며 “그랬기에 저 역시 최선을 다했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스스로에게 떳떳했다”고 밝혔다.

그간 그림책을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펼쳐온 그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매체에 대한 편견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백 작가는 “이제는 출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며 “이야기의 힘이 가장 중요하다는 전제하에 콘텐츠 중심으로 다양한 매체로 확장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다”며 IP의 확장가능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데뷔 20년 차 중견작가로 이번 전시에서 그동안 창작한 ‘자식 같은’ 작품을 한 자리에 선보이는 기쁨도 누리게 됐지만, 백 작가에게도 가슴 아픈 순간이 있었다. 작가의 첫 그림책 ‘구름빵’은 2004년 출간 후 전 세계 10개 국어로 번역되고 애니메이션과 뮤지컬로도 제작되며 콘텐츠 부가가치만 4000억원 이상 추산됐다. 하지만 출판사와 계약 당시 저작재산권을 일괄 양도하는 ‘매절계약’을 맺으면서 작가가 구름빵으로 번 수익은 1850만원이 전부가 됐다.

'백희나 그림책' 전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는 백희나 작가. [사진제공 = 예술의전당]

이후 백 작가는 출판사를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제기했지만 3심 모두 패소했다. 그는 최근 회자된 ‘검정고무신’ 저작권 문제를 지켜보면서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작가는 “(저작권 문제는) 기본적으로 존중의 문제고, 저작권이든, 아이들의 그림이든, 작품과 창작권에 대한 존중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출판, 문화계에서 작가들이 창작 욕구를 잃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을지 걱정될 만큼 우리나라의 창작 유통 구조가 이상적이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하고, 이번 전시를 통해 아이들에게는 즐거움을 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내가 계획한 목표는 기적적으로 다 이루고 해냈다. 전시를 본 아이들이 나도 뭔가 만들고 싶다는 창작 의욕이 생기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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