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북으로 완독한 '토지'가 나를 평사리로 이끄네

김재근 2023. 7. 5.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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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토지> 의 고장 하동군 악양 기행

[김재근 기자]

▲ 섬진강 화개장터 앞 다리 위에서, 우측 다리지나 오른쪽이 쌍계사 방향이다.
ⓒ 김재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시간이 안 간다고 투덜거릴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어른이 되면 시간이 너무 빨라 정신이 없다고.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라고.

어른은 금방 되었다. 시간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흐른다. 요즘은 아침 먹고 뒤돌아서면 저녁이다. 어른도 급이 있다면, 완숙의 경지다. 올해도 벌써 절반이 지났다. 난롯가에 앉아 신년 맞이 계획을 세운 게 엊그제인 듯 선한데, 에어컨 아래서 한 해의 절반을 되새기고, 지키지도 못할 계획을 붙들고 있다.

올해 들어 지금까지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단연 <토지>일 게다.
  
▲ 섬진강 평사리 공원, 섬진강 모래사장
ⓒ 김재근
수십 년 전에 들었다. 두 부류의 사람이 있댔다. <토지>를 읽은 자와 읽지 않은 자. 대한제국이 수립됐던 1897년 한가위부터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까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 댁 일점 혈육 서희와 하인 길상의 일생을 담은 대하소설이다.

몇 차례 도전을 하긴 했었다. 제일 많이 나갔던 게 2부 1권 절반쯤이다. 글쓰기 공부를 하면서 다시 토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쉽지 않았다. 대신 듣기로 했다. 매달 11900원 주고 '오디오북'에 가입했다. 자다가, 걸으며, 운전하며 짬짬이 들었다. 그렇게 박경리가 26년 걸려 쓴 것을 6개월 만에 끝냈다.

듣기는 읽기에 비해 독서의 효과는 부족했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5학년'이 넘어서야 <토지>를 읽은 사람 부류에 턱걸이나마 겨우 들어서게 되었다.

대장정을 마치고 나니 공허함이 들었다. 습관처럼 1권을 한 번 더 들었다. 이게 웬걸, 모래알 같았던 내용이 찰지게 뭉쳐졌다. 올 하반기 계획을 "다시, 토지"로 정했다. 다시 한번 더 듣기로 했다. 활자로도 완독하고. 한 권을 듣는데 대략 12시간 걸렸다. 읽는데도 그 정도일 것이다. 1부에서 5부까지 마로니에북스 판으로 20권. 하루에 두 시간씩, 게으름만 피우지 않는다면 충분하겠다.
 
▲ 악양들판과 섬진강 평사리 한산사 전망대에 굽어 본 풍경.
ⓒ 김재근
마침 지난달(6월 19일) 하동 악양면에 다녀왔다. 평사리가 보고 싶었고, 그간 고생한 내게 조그만 선물이라도 주고 싶어서였다. 평사리 공원 섬진강 모래사장에서 강물에 손을 씻고, 한산사 전망대에서 섬진강과 악양 들판을 굽어보았다. 최참판댁은 들르지 않았다. 지리산 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 악양초등학교 구령대, 백 년의 세월이 느껴진다.
ⓒ 김재근
악양초등학교에서 백 년 세월 속으로 거닐었다. 정서리에 자리한 화사별서에서 기와집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화사별서는 조부자집으로도 불리는 조씨 고가다. 그래서 이곳이 소설 속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이라는 말도 떠돈다. 토지를 읽기 전에 이런 소문을 믿었다.
 
▲ 화사별서 마당 앞 연못에서 바라 본 화사별서 전경
ⓒ 김재근
토지 2002년 판 서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지도 한 장 들고 찾아와 본 적이 없는 평사리." 작가는 죽어 물어볼 수 없다. 다만 토지를 들으며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을 쓰기 전에 평사리를 가보지 않았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평사리의 실체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사별서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이곳의 가치는 다른 데 있다. 바로 기와지붕이다. 독보적인 아름다움이다. 여러 차례 다녀왔다. 이 아름다움도 오래가지 못할 듯하다. 기와집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다. 나무가 썩으면 바꾸고 물이 새면 지붕을 다시 해야 한다. 이 집도 수리할 때가 지났다. 집주인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의 모습을 잃어버릴까 염려해다. 이 일을 할 사람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 화사별서 본채 기와 마루 선이 독보적인 멋을 간직하고 있다.
ⓒ 김재근
토지를 읽으며 악양 들판이, 지리산이, 섬진강이 그리울 때가 있다. 혹시 평사리에 갈 일이 있거든, 화사별서도 들러 보길 권한다. 그곳에 가거든, 지붕을, 기와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멋을 잠깐이라도 맛보았으면 한다.

읽기가 끝나갈 즈음이면 12월도 저물 것이다. 완독 기념으로 평사리에서 정서리까지 다시 거닐 때, 어쩌면 눈이 펑펑 내릴지도. 7월 초입, 장맛비가 오락가락한다. 물난리로 고생하는데 나들이는 사치다. 비 그치면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것이고. 이맘때 독서만 한 것도 없을 게다. 토지 첫 권 첫 장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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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화순저널"에도 실립니다. 네이버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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