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인데 '흑인우대' 반대한 대법관…맬컴X 추앙자의 배신?
미국 연방 대법원이 지난주 소수인종 우대정책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후폭풍이 여전한 가운데 클래런스 토머스(75) 대법관이 화제를 몰고 있다. 소수인종 우대정책의 골자는 흑인에게 대학 입학 등에서 혜택을 준다는 것인데, 흑인인 토머스 대법관이 이 정책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토머스는 이전에도 대법원 안에서 보수적인 판단을 내리기로 유명했다. 2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토머스 자신도 대학생 시절엔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보수색채를 띠게 이유는 뭘까. 가디언은 "자수성가한 그는, 자신의 성공이 인종우대 정책 덕분이라는 생각을 수십 년 동안 거부해왔고 이는 그의 자아상의 핵심이 됐다"며 "차별을 투지와 인내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고 분석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토머스는 어린 시절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모욕을 겪었다. 1948년 조지아주에서 농장 노동자 아버지와 가사 노동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되던 해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나면서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장시간 일하고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세인트 존 비애니 고등학교에 흑인 최초로 입학했지만, 괴롭힘을 당하곤 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대에 진학했지만, 교회가 인종차별과 맞서 싸우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에 실망하고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토머스는 홀리크로스대 영문학과에 편입한 뒤 흑인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ABC 뉴스에 따르면, 교내 흑인 학생연합 설립을 주도했고, 급진적 흑인 민권운동가로 평가받는 맬컴 엑스(Malcolm X)의 포스터를 기숙사에 붙여놓을 정도였다. 그는 식당에서 설거지하며 학비를 벌면서도 열심히 공부했고, 71년 예일대 로스쿨에 흑인 학생 12명 중 한 명으로 입학했다.
명문대 로스쿨에 입성한 뒤에도 차별은 계속됐다. 백인인 입학 사정관으로부터 "사실 흑인은 입학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들었고, 졸업 뒤엔 로펌으로부터 번번이 입사를 거부당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사람들은 내 학위가 흑인 차별금지 운동 덕분이라고 생각했다"며 "내가 성적만큼 똑똑한지 의심하며 은연중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고 말했다.
시련 속에서 그가 선택한 건 인종차별을 탓하거나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게 아니었다.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장벽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가디언은 "(흑인으로서) 우대를 받는 것은, 흑인도 당연히 교육과 고용의 기회를 받아야 한다는 명제에 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고 전했다.
토머스의 이런 생각은 이번 위헌 의견서에도 잘 나타난다. 그는 "특정 인종의 입학을 보장하는 정책은 개인의 성취에 대한 모욕"이라며 "희생자에 머무르지 않고 장벽을 뚫고 나아가려는 젊은 세대에게 암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같은 흑인으로 자신과 반대 의견을 낸 커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을 겨냥해 "과거 노예제가 여전히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토머스는 91년 조지 H. W. 부시의 지명으로 역사상 두 번째 흑인 대법관이 됐다. 31년간 재직 기간 동안, 대법원의 6(보수)대 3(진보) 구조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법관으로 평가받았다. 지난해 여성의 낙태권은 헌법상 권리가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이 나온 뒤엔, 그를 탄핵해야 한다는 국민청원 동의 수가 100만 명에 달하기도 했다.
백인으로 워싱턴 정가에서 로비스트로 활동하는 그의 부인 지니 역시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2020년 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불복했을 당시, 지니가 마크 매도스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과 29차례에 걸쳐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크라켄(바다 괴물)을 풀어 좌파가 미국을 끌어내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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