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그 많던 혁신안은 지금 어디 있는가
뜨고 지기 반복한 여야 혁신위
의원 특권 내려놓는 역할보다
당권 강화 위한 세력교체 강조
계파 갈등 정리할 게 아니라면
개혁의 길 나서 명분 찾아야
여야를 막론하고 우리나라 정당에 혁신위원회만큼 자주 등장한 조직은 없을 것이다. 대체로 당대표가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쫓겨나면 비상대책위원회가 생기고, 버티면 혁신위가 뜬다. 대선이나 총선을 앞두고 실시된 재·보궐 선거에서 패한 당은 십중팔구 혁신위를 내세운다. 생사를 건 결전일은 다가오고, 표심이 어디를 향하는지 뻔히 보이는데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어서다. 대형 비리사건이 터지거나 의원들의 몰염치한 구태가 질타를 받을 때도 그랬다. 성난 민심을 달래려면 뭐라도 해야 하는데, 당장 당권을 포기하지 않고 돌파하기에는 혁신위보다 좋은 게 없다.
그러니 수많은 혁신위가 뜨고 지기를 반복했다. 지금 더불어민주당에는 ‘김은경 혁신위’가 있다. 지난해 송영길 당시 대표가 만든 ‘장경태 혁신위’는 올해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2차 활동을 마감했다. 2020년에는 ‘김종민 혁신위’, 2017년 ‘최재성 혁신위’, 2015년 ‘김상곤 혁신위’, 2014년 ‘원혜영 혁신위’가 등장했다. 2009년에는 정세균 통합민주당 대표가 총선에서 패하자 ‘김원기 혁신위’를 띄웠고, 2005년 4·30 재보궐선거 참패로 과반 의석을 잃은 열린우리당에서는 ‘한명숙 혁신위’가 발족했다. 당명이 계속 바뀌고 혁신위를 부르는 이름도 조금씩 달랐지만 혁신위 한번 만들지 않은 당대표는 찾기 힘들었다.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지방선거 직후 등장한 ‘최재형 혁신위’는 지난 3월 최종보고서를 제출하고 대기 중이다. 자유한국당에는 ‘김용태 혁신위’(2018년)와 ‘류석춘 혁신위’(2017년)가 있었고, 2014년 새누리당에는 ‘이준석 혁신위’와 ‘김문수 혁신위’가 떴다. 2005년 한나라당의 ‘홍준표 혁신위’는 여의도의 이슈 메이커였다. 2000년 이회창 총재가 ‘국가개조를 위한 혁신위원회’를 발족한 이래 지도부가 흔들리면 곧바로 혁신위가 얼굴을 내밀었다.
과거 사례를 살피면 겉모습과 다른 혁신위의 실체가 보인다. 많은 유권자가 혁신위의 역할로 정치인의 기득권을 깨고 잘못된 관행을 갈아엎는 것을 꼽는다.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빠르게 개혁할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권력을 놓고 싸우는 정치인의 생각은 다르다. 지금까지 도덕적 목표만 앞세운 혁신위가 성공한 적은 거의 없다. 지난해 의원 면책·불체포특권 제한, 동일지역구 3선 연임 제한, 위성정당 창당 방지를 내세운 ‘장경태 혁신위’가 소득 없이 끝난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당이 가장 성공한 모델로 꼽는 ‘김상곤 혁신위’는 특이한 경우다. 이들은 유권자들이 강하게 주장했던 특권 폐지에 올인하지 않았다. 2015년 취임 3개월 만에 퇴진 요구에 직면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조국 서울대 교수 등 외부인사를 영입해 혁신위를 띄우고 “나부터 기득권을 내려놓는다”고 선언했다. 이후 146일 동안 쏟아진 혁신안은 거의 모두 당헌당규에 반영됐다. 여기에는 부패연루자 당직 박탈, 재보궐 원인 제공시 무공천 같은 조항도 있었지만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온 진짜 이유는 공천 개혁이었다. 사무총장제 폐지, 현역위원 20% 배제,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회 설치는 당내 계파 갈등을 정리하고 비주류를 축출해 대표의 당권을 강화하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 당연히 대선 승리의 디딤돌이 됐다. 국민의힘에서 성공한 혁신위로 평가하는 ‘홍준표 혁신위’는 출발부터 비주류 일색이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혁신안을 수용한 박근혜 당시 대표는 적지 않은 정치적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는 당내 세대교체로 이어졌고, 장기적으로 보수정권 10년의 발판이 됐다.
그렇다면 지금 ‘김은경 혁신위’가 향하는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의원 불체포특권 폐지를 1호 혁신안으로 내놓고 꼼수 탈당 방지를 곧 제안한다는데 존재감이 아예 없다. 과거 혁신안에 늘 등장했던 단골 메뉴를 또 제안하고, 그마저 당 소속 의원들에게 무시당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격화되는 계파 싸움을 정리하는 트리거로 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 소속 의원들의 도덕성 위기 때문에 혁신위를 발족했는데, 혁신의 이름으로 주도권을 쥐고 나아갈 세력과 위기를 초래한 혁신 대상의 경계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이 대표가 혁신위를 지렛대로 쓸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래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 이름만 남은 과거 혁신위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유권자들은 또 묻는다. 그 많던 혁신안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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