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기사 바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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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이렇게 생겼는가 하는 어렴풋한 깨달음은 늘 기사의 경계 바깥에서 다가왔다.
그 유족은 기사 출고 직전 마음을 바꿔 "기사를 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왔다.
그 기관이 이렇게 생겼구나, 멀겋게 쓴 기사 너머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생겼는가 하는 어렴풋한 깨달음은 늘 기사의 경계 바깥에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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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이렇게 생겼는가 하는 어렴풋한 깨달음은 늘 기사의 경계 바깥에서 다가왔다. 때로는 내놓고 하는 말에 의도가 섞였고, 내놓고 하지 못하는 말에 진실이 담겼다. 잘 적으려 애를 써도 늘 실체가 기사보다 복잡했다. 정작 더 큰 이야기는 기사의 경계선상에 머무르곤 했다.
간첩 혐의로 수사를 받던 이에게서 본인과 동료의 구속영장 청구서를 통째로 받아 읽은 적이 있었다. 충성 혈서와 지령문이 등장하는 범죄사실에 바보같이 “보도돼도 무방하냐”고 물었었다. 그는 “모든 조작을 공개하려 한다”고만 답했고, 기사에 화를 내는 대신 “참 재미있다”며 웃기도 했다. 나중에 보니 수사기관은 그가 주변에 수사 상황을 알려 증거를 인멸하려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보도에 실패해서 세상을 더 배운 때도 있었다. 사형제의 위헌성 여부가 관심을 끌 때, 유능한 후배 기자가 살인사건 피해자 가족을 설득해 인터뷰를 해 왔었다. 사형제에 대해 단 한 명이 말할 수 있다면 그 유족이었을 것이다. 그 유족은 기사 출고 직전 마음을 바꿔 “기사를 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왔다. 범죄자가 언젠가 사회에 복귀할 수 있으며 기사를 읽으면 반드시 자신을 찾아올 것이란 불안감이었다. 독자에게 전하지는 못했으나 사법의 끝에 죄인과 피해자 중 누가 더 고통받는지를 역설적으로 잘 알 수 있었다.
어느 기관장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작별인사까지 다 나눈 실무진이 몰래 따라 나온 적도 있었다. “아까 들은 말씀을 그대로 적으시면 저희가 곤란해집니다.” 자리에 동석해 이런저런 지시사항을 하달받은 실무진이었다. 기관장의 말이 원론적으로 옳으나 단정적으로 보도되면 돌이킬 수 없어지고 다른 기관과 마찰 소지마저 있게 된다는 우려였다. 진정 전할 만한 장면은 실무진의 토로였을 텐데 약속을 어기고 쓸 수가 없었다. 그 기관이 이렇게 생겼구나, 멀겋게 쓴 기사 너머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한번은 계약이 풀리는 프로야구 선수의 행선지를 취재하다 선수로부터 “아직 협상 중인데 무슨 의도로 방해하느냐”는 거센 항의를 받았었다. 그가 스스로 털어놓은 말을 해당 구단에 되물었다 벌어진 일이었는데, 이후 ‘팬에 대한 보답’ 같은 낭만적 입장이 발표될 때면 씁쓸해졌다. 정계에 진출하려는 인사가 “내가 찾아갔다고 할까, 나를 찾아왔다고 할까” 고민하는 걸 듣기도 했었다. 그저 있는 대로 명확히 쓰라는 준엄한 질책을 만날 때면 기사의 경계가 좁아 드는 것이 부끄러웠다.
뒤늦은 깨달음은 다음 기사를 위해 새겨둘 뿐이다. 지난달 이슈&탐사팀은 올 들어 백화점에서 ‘500만원 이상’ 카드결제액이 4년 전의 3.4배가 됐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기사는 빅데이터를 제공한 카드사의 이름과 함께 보도될 예정이었다. 고액 소비 증가 실태만 숫자로 전할 뿐 사치나 허영을 말하지 않았고 독자의 시각을 열어두려 했다. 미래가 불투명해 현재에 충실해진 구조적 요인이 먼저이며, ‘내돈내산’ 명품 소비를 죄악시할 수 없으며, 이젠 소비가 신분을 나타내는 사회임을 받아들이란 가르침이 넘쳐났다. “과소비 지적은 ‘쌍팔년도’ 기사”라며 이죽거리던 교수도 있었다. 정작 카드사는 익명을 요구했다. 고객들이 “내가 부정적인 행위를 했나” 생각할 것이 우려된다는 설명이었다. 해외 명품 브랜드와 수입차 판매업체들은 이름을 내걸고 한국인의 안목과 구매력에 대한 칭찬을 회신하던 때였다. 똑같은 일이 왜 한편에선 숨기고픈 일이고 또 다른 한편에선 홍보할 일일까. 세상이 이렇게 생겼는가 하는 어렴풋한 깨달음은 늘 기사의 경계 바깥에서 다가왔다. 때로는 내놓고 하는 말에 의도가 섞였고, 내놓고 하지 못하는 말에 진실이 담겼다.
이경원 이슈&탐사팀장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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