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의 빛을 따라] 교회의 시간, 상인의 시간

2023. 7. 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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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변화 혹은 흐름만이 영속적이다. 유장하기 이를 데 없는 산도 바다도 변한다. 산은 계절에 따라 다른 옷을 입고 세상과 마주한다. 바다는 끊임없이 출렁임으로 싱싱함을 유지한다. 굳건해 보이는 바위가 허물어져 모래가 되고 그것이 변하여 토양이 되기도 한다. 늙은 바위는 자기 위에 떨어진 씨앗을 위해 자기 몸 일부를 열어준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이나 흥망성쇠 혹은 성주괴공이라는 말은 모두 무상한 것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쓸쓸함을 반영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모든 것을 낡게 만든다. 시인 나희덕은 ‘부패의 힘’이라는 시에서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안심한다고 말한다. 녹슬 수 있음에 안심하는 아이러니 속에 생의 신비가 있다. 시인은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째서 그런가. 시인은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고 ‘일종의 무릎 꿇음’이라고 말한다.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지혜다. 한계를 인정하지 않음이 어리석음이다.

종교는 영원한 삶을 가르친다. 영원한 삶이란 시간의 무한한 연장 혹은 썩지 않거나 스러지지 않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는 순간 자기 이름을 잃지만 더 큰 세계의 일부가 된다. 개체로서의 나의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영원에 잇대어 살 때 그는 지금 여기서 영원을 살고 있다 할 수 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흐름에 자기를 맡기는 이들은 평안하다. 전도서는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셨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눈이나 그것을 누릴 여백이 없다는 것이다. 인생이 무겁다고 느낄 때마다 ‘이때의 아름다움이 무엇일까’ 자문한다. 쉬운 대답은 없지만 그 문제의 무게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은총의 흐름에 나를 맡기는 데서 자유가 확보된다. 그 흐름이 나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치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지만 그것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평안이 찾아온다.

역사가인 최종원 교수는 ‘수도회 길을 묻다’라는 책에서 중세 사가인 자크 르 고프가 들려주는 시간 이야기를 소개한다. 자크 르 고프는 자연의 시간과 농부의 시간을 따라 이루어진 수도회 일과를 ‘교회의 시간’이라고 하고, 그에 대비되는 시간을 ‘상인의 시간’으로 구분한다. 교회의 시간은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데 삶의 초점을 맞추는 것을 가리킨다. 교회의 시간을 사는 이들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이웃을 배려하며 산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고, 여행자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다.

‘상인의 시간’을 사는 이들은 자기들의 욕망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다. 욕망은 결핍이고, 결핍은 채움을 요구한다. 자기의 결핍이 채워지기 전에는 타자들의 결핍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결핍이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욕망의 서사에 사로잡힌 이들은 결핍과 채움의 쳇바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채움은 잠시 동안 만족을 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욕망이 그를 확고하게 사로잡게 마련이다.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불안이라는 숙명 속에서 살아간다. 불안은 공포와는 달리 특정한 대상으로 인해 발생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유한함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그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안의 대용물들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분주함을 통한 불안의 망각은 인생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더 큰 자기 분열의 단초일 뿐이다. ‘상인의 시간’을 ‘교회의 시간’으로 전환할 때 우리 마음을 확고히 사로잡고 있던 불안은 조금씩 스러진다. 불안이 사라진 자리에 세상 도처에 깃든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이 자리 잡는다. 변화 혹은 흐름은 덧없음이 아니라 삶의 다른 무늬일 뿐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간 속에서 영원을 발견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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