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의 초인싸, 백은하 소장이 직접 엘르에 전해온 칸 국제영화제의 고유하고 생생한 기록
“이선균 파이팅! 주지훈 파이팅!! 〈탈출〉 파이팅!!!!” 제76회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된 영화 〈탈출: Project Silence〉의 레드 카펫 행사가 한창이던 5월 21일 자정. 뤼미에르 극장은 어디선가 날아온 우렁찬 한국인들의 응원 소리로 가득 찼다.
레드 카펫이 내려다보이는 맞은편 고층 아파트 테라스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스냅백을 뒤로 쓴 채 소리를 지르는 남자는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는 배우 송중기였다. 그 옆에 선 〈화란〉의 김창훈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제작사 사나이픽처스의 한재덕 대표까지 한 무리의 열광적인 한국영화 팬처럼 보이는 이들은 사흘 후 진행될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화란〉의 프리미어를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밤만큼은 〈탈출〉 팀의 칸 입성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목이 쉬도록 환호하고 있었다.
반대편 레드 스텝스(Red Steps) 꼭대기에서 멋진 턱시도를 입고 손을 흔들며 화답하는 배우 이선균은 〈탈출〉과 함께 ‘비평가 주간’ 부문에 초청된 영화 〈잠〉까지 두 편의 작품을 들고 막 프랑스로 날아온 참이었다. 나는 어제 그와 반나절 동안 함께 여행했다. 촉촉한 봄비가 내리는 지중해를 바라보며 모닝 에스프레소를 즐긴 뒤 칸의 대표적 인도어 마켓 포르빌(Forville) 시장에 들렀다가 르 쉬케(Le Suquet) 언덕을 오르고, 영화제 공식 굿즈 숍을 구경했다. 바쁜 취재와 공식 행사에서 잠시 벗어나 관광객 모드를 즐길 때만 해도 친구와 가볍게 소풍 나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식당에서, 거리에서 한눈에 ‘〈기생충〉의 그 배우’를 바로 알아본 영화 팬들이 다가와 사인과 사진을 부탁하는 순간, 여기가 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오후에는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의 배우 전여빈과 드뷔시 극장 앞에서 조우해 포옹을 나눴다. 지난밤 니스 공항에 도착했다는 그는 생애 첫 칸영화제행에 대한 흥분을 감추지 않은 채 영화제 배지를 목에 걸고 이곳저곳을 호기심 많은 고양이처럼 자유롭게 탐험 중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거미집〉 프리미어 현장에서 목도한 배우 전여빈은 동서양을 반하게 만들 강력한 카리스마로 전 세계 사진기자들의 플래시를 거미줄처럼 포획하고 있었다.
레드 카펫 위의 ‘K’ 그리고
영화제 내내 레드 카펫 위에 선 K스타들을 만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브랜드 앰배서더 자격으로 칸을 찾은 블랙핑크의 로제, BTS의 뷔, 배우 노윤서, 그룹 에스파뿐 아니라 〈디 아이돌 The Idol〉 캐스트 중 한 명으로 레드 카펫에 선 제니까지 팬데믹 동안 움츠러 들었던 브랜드들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2주간의 축제를 젊은 소비자들이 열광할 만한 동시대 스타들의 이름으로 채우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영화제가 후반부로 접어들던 25일, 저녁 해로 물들던 칸의 식당가 건널목에서 인사를 건네온 사람은 모든 일정을 마친 배우 송중기와 그의 아내 케이티 루이즈 손더스였다. “이제 한숨 돌리고 저녁 좀 챙겨 먹이려고 나왔어요”. 그녀의 솟아오른 배 안엔 모두가 궁금해하는 새로운 생명이 막 인사를 건네기 직전이었다. 10월의 부산이 아니다. 바로 5월의 칸영화제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제53회 칸영화제에는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과 함께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감독 주간’ 부문) 그리고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비평가 주간’ 부문)가 나란히 초청됐다. 그렇게 2000년은 인류의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동시에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여는 해로 기록됐다. 이후 칸영화제는 2002년 〈취화선〉으로 임권택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이후 〈올드보이〉의 심사위원 대상을 시작으로 〈박쥐〉의 심사위원상, 〈헤어질 결심〉의 감독상까지 박찬욱 감독에게 칸의 모든 영광을 허락하며 ‘깐느 박’이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2007년 〈밀양〉으로 전도연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14년 후 송강호 배우는 〈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송강호는 지금까지 초청작의 배우로, 심사위원으로, 폐막식 시상자로, 〈넘버 3〉에서 연기한 조필의 대사처럼 칸영화제를 그야말로 ‘안방 드나들 듯’ 여덟 번이나 드나들었고, 올해는 〈거미집〉으로 어김없이 카펫 위에 서 있었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내려진 황금종려상은 이후 이 영화를 향한 긴 축포의 시작점이 됐다.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 칸에서 열리는 가장 보수적인 유럽의 영화 축제는 어느덧 한국 대중에게도 더없이 익숙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칸에 초청된 것만으로도 영광이고 황송해하던 시절은 이미 끝난 듯했다. 올해 칸영화제에 초청된 한국영화인들은 일흔여섯이 된 고령의 영화제를 저마다 젊은 기운으로 활기차게 즐기고 있었다.
영화는 늙지 않는다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면서 가속도가 붙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 전 세계적으로 시네마 위기론이 대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라는 매체의 존재 이유와 방식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는 가운데 경쟁 부문에 초청된 〈어 브라이터 투모로 A Brighter Tomorrow〉의 난니 모레티 감독은 이 문제를 솔직하게 대면하는 영화를 완성했다. 한때 가장 진보적인 감독으로 불렸던 일흔 살의 이탈리아 거장은 더 이상 젊은 대중과 소통할 수 없는 예술가로서 자신과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거대 플랫폼 앞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필패를 확신한다. 한때 서커스 시대가 저물었던 것처럼 시네마 시대도 끝날지 모른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시네마의 전설들과 동시대 영화인들이 합창하는 이 영화의 엔딩은 ‘더 밝은 내일’을 맞이할 다음 세대에 대한 무조건적 응원과 긍정을 담고 있다.
제76회 칸영화제의 외양을 화려한 스타들이 장식했다면, 내실은 노장들의 여전한 노동일지로 채워졌다. 올해 영화제 포스터를 장식한 얼굴은 1968년 영화 〈라 샤마드 La Chamade〉를 촬영했던 20대 초반의 배우 카트린 드뇌브다. 〈쉘부르의 우산〉으로 알려진 프랑스 국민 배우 카트린 드뇌브는 몇 해 전 촬영 중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빠르게 영화 현장으로 복귀했고, 현재 두 편의 신작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개막식 레드 카펫을 찾은 여든 살 배우의 당당한 등장에 영화제 공식 포스터 속의 젊은 모습은 분명한 역사이자 아름다운 배경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비경쟁 부문’을 통해 첫 공개된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은 여든의 나이에도 전설적 시리즈를 가장 현재적 모험으로 채우고 있는 노장 해리슨 포드와 함께였다. 배우로 활동하는 동안 칸영화제에 한 번도 초청받은 적 없던 해리슨 포드에게 칸영화제는 ‘명예황금종려상(공로상)’으로 뒤늦은 존경을 보냈다. 1942년생으로 해리슨 포드와 동갑내기인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는 영원한 동지인 배우 로버트 드 니로(그들의 인연은 1976년 〈택시 드라이버〉부터 시작됐다)의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느릿느릿 레드 카펫 계단을 올라왔다. 그러나 그의 신작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 Killers of the Flower Moon〉만큼은 20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좀처럼 느리지 않은 속도와 패기로 끌고 간다.
1949년생 스페인 출신의 거장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25년 만에 해후한 서부 사나이들의 사랑을 담은 31분짜리 단편 〈스트레인지 웨이 오브 라이프 Strange Way of Life)를 통해 한 번도 꺼진 적 없는 사랑의 불씨를 재점화시킨다. 이들은 모두 지난날의 화려한 영광으로 연명하는 왕년의 스타 배우와 감독이 아니라 여전히 노동하는 영화 노동자다.
특히 〈괴물 Monster〉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부활’이라 할 만하다. 2018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어느 가족〉 이후 프랑스(〈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한국 (〈브로커〉) 등 해외 작업을 이어갔던 고레에다 감독이 자국으로 돌아가 촬영한 〈괴물〉은 두 명의 ‘사카모토’와의 협업이 빛나는 작품이다. 우선 사카모토 유지는 90년대 드라마 〈도쿄 러브스토리〉를 시작으로 〈마더〉〈그래도, 살아간다〉 등 일본 대표 드라마의 명성을 쌓은 작가다. 결국 올해 각본상을 거머쥔 사카모토 유지의 시나리오는 소년들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어머니, 선생님 그리고 소년들의 시선으로 나눈 세 개의 챕터를 통해 ‘라쇼몽’ 식으로 풀어나간다. 사카모토 유지를 통해 마치 혈액형이 완전히 일치하는 수혈을 마친 듯 초기작의 기괴하고 날카로운 시간으로 돌아간 고레에다는 올해 3월 28일 세상을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창조한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기괴하고, 어둡고, 비밀스러운, 그러나 결국 찬란하게 아름다운 세계로 관객을 안내한다.
한편 심사위원상을 거머쥔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폴른 리브스 Fallen Leaves〉는 누가 봐도 생명의 가능성이 떨어져버린 ‘고엽’ 같은 중년 남녀에게 찾아온 희미한 사랑에 대한 찬가를 부른다. 그렇게 누군가는 아름다운 안녕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끝까지 노동하고, 누군가는 새롭게 태어난다. 누군가는 절멸의 운명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품고 카메라 앞에 선다. 영화는 계속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은 잠시 접어두어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미래를 가동할 연료는 막연한 염려가 아니라 분명한 오늘의 노동에서 나오는 것일 테니 말이다.
NEW STORYTELLER ON THE BLOCK〈잠〉유재선 감독
분명 공포영화를 보고 있는데 웃음이 터져나온다. 데뷔작으로 제76회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 부문에 초청된 유재선 감독의 〈잠〉은 젊은 부부와 잃어버린 강아지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의심스러운 이웃까지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처음 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옥자〉연출부로 2년 동안 봉준호 감독의 영향 아래 있었다. “영화 만들기에 대한 모든 것은 봉준호 감독과 함께한〈옥자〉를 통해 배웠다”고 말하는 유재선 감독의〈잠〉은 서늘한 현실과 이상한 유머가 엎치락뒤치락하는 3막의 서스펜스를 쌓아나간다. “누가 들어왔어….” 곧 출산을 앞둔 수진(정유미)은 갑자기 시작된 남편 현수(이선균)의 수면 중 이상 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는 잠이 드는 순간 가족도 해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사람으로 돌변한다. 배우 정유미의 말대로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러브스토리’라 할 만하다. 평소 몽유병에 대한 뉴스 혹은 블로그 글을 접하면서 “이 사람들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는 유재선 감독은 보통의 장르 영화가 “주인공이 위협의 대상,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주요 구조라면 몽유병 환자의 가족에게는 본인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존재가 자신이거나 자신이 사랑하고 지켜줘야 하는 존재라는 아이러니”에 주목했다. 어쩌면 ‘공포영화’라는 장르보다 사람과 그 사이의 관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유재선 감독의 우주는 의외의 곳을 향해 확장될 가능성이 감지된다. 이야기꾼의 등장이다.
A NEW KID ON THE BLOCK 〈화란〉 배우 홍사빈
“언제 왔어, 이 동네?” “태어났는데요….” 〈화란〉에서 폭력 조직의 중간 보스 치건(송중기)은 이 ‘글러먹은’ 동네를 자꾸 떠도는, 어딘가 잔뜩 주눅든 모습의 소년 연규(홍사빈)가 눈에 들어온다. 치건에게 연규가 그랬던 것처럼 관객에게 홍사빈은 이 동네에서 낯선 얼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홍사빈에게 이 동네는 태어나서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곳이기도 하다. 대학로를 상징하는 〈연극열전〉을 탄생시킨 연극연출가 홍기유를 아버지로 둔 1997년생의 홍사빈은 한때 ‘배우를 하고 싶은 마음을 들키는 게 창피했을’ 만큼 ‘잘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심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이후 프로젝트 ‘빈공간’의 대표로, 배우이자 창작자로 다양한 실험을 이어갔다. 독립영화 〈만인의 연인〉에서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하룻밤을 보낸 아침, 이불 아래로 삐죽 솟아 나온 그녀의 찬 발에 주섬주섬 양말을 신겨주던 세심한 손의 움직임, 〈화란〉에서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함께 고통받던 의붓남매 하얀(김형서)을 살피는 애틋함을 표현해 내는 이 배우의 연기는 조용하지만 깊다. 장편영화 데뷔작 〈화란〉을 “어떤 소년이 좋은 희망을 찾아가려는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그에게 한국영화의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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