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백선엽 장군과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한 곳에 선다

장세정 2023. 7. 4. 23: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6·25전쟁 향방 바꾼 경북 칠곡 다부동 전투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 남침으로 대한민국을 단숨에 적화하려던 김일성은 그해 7월 20일 충북 수안보까지 내려왔다. 밀리던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치고 지연전을 펼쳤고, 미군이 신속히 참전하자 조바심이 난 김일성은 수안보에서 전선 회의를 주재하며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 통일 전쟁을 끝내라"고 지시했다. 그런 김일성 앞에 백선엽(1920~2020) 사단장이 이끌던 국군 1사단과 미군 27연대가 가로막고 버텼다.

3, 13, 15사단을 앞세운 북한군의 8월 공세가 시작되자 경북 칠곡군 다부동 일대에서 8월 29일까지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8월 21일 대구로 가는 간선도로 길목인 칠곡군 천평동 계곡의 일부가 북한군에 뚫려 다부동 방어선이 무너질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당시 백 사단장은 500여명의 부하 앞에서 외쳤다.

「 백 장군 3주기에 동상 제막식
무명 '지게부대' 영웅 추모비도
장녀·경북도민 등 기부 및 성금
기념재단 이사장에는 김관진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우리가 밀리면 미군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장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백 사단장이 이렇게 독려하며 권총을 뽑아 들고 앞에서 뛰자 그의 뒤를 따라 적진으로 돌격한 장병들이 산을 넘어오던 북한군을 격퇴하고 극적으로 고지를 탈환했다.

뚫렸으면 부산까지도 위험해질 판
6·25전쟁 중에 벌어진 수많은 전투 중에 특히 다부동 전투는 국가 존망이 걸린 전투였다. 백 사단장의 말처럼 만약 다부동에서 패했으면 대구가 점령되고 부산의 안전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다부동 전투 와중이던 8월 18일 임시수도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전했을 정도로 전황이 급박했다. 백 장군의 장녀 백남희(75) 씨는 "다부동 전투는 국군과 미군이 처음 함께 싸운 첫 전투"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6·25전쟁의 향방을 바꾼 다부동에서 오는 5일 몇 가지 의미 있는 행사가 열린다. 다부동 계곡에서 고지전 와중에 총탄을 뚫고 병사들에게 탄약과 식량을 져 나르고 전사자와 부상병을 호송해준 당시 칠곡 주민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73년 만에 처음 건립된다. 당시 군인들의 '생명줄' 역할을 했던 그들을 국군은 '지게 부대'로, 미군들은 'A-frame Army'라 불렀다.
다부동 전투에서만 지게 부대원 2800명가량이 희생됐지만, 군인도 정식 군무원도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름 없는 영웅들'인 셈이다. 백남희 씨는 사재를 기부해 160㎝ 높이의 ‘다부동 전투 지게 부대원 추모비’를 만들었다. 추모비를 만든 이유에 대해 백씨는 "생전에 아버지는 지게 부대원들이 빛을 못 보고 잊히고 있다며 마음 아파하셨다"고 전했다.
같은 날 오후엔 백선엽 장군 3주기에 맞춰 동상 제막식과 추도식이 거행된다. 지난달 27일 미리 찾아 가본 다부동 전적기념관(관장 신슬우) 주변은 마무리 공사와 주변 정리가 한창이었다. 2분마다 360도 회전하도록 설계된 4.2m 높이의 '백선엽 장군 동상'은 흰색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백 장군, 매년 다부동에서 모임 가져
백 장군 동상이 다부동에 들어선 이유는 그와 다부동을 떼어 놓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백 장군은 2020년 7월 10일 타계 전까지 매년 9월 전우들과 다부동에서 모임을 가질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백남희 씨는 "국립대전현충원에 계시는 아버님을 여러 조건이 되면 다부동에 모시는 방안도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백 장군 동상은 자유총연맹 이우경 경상북도 회장이 2022년 추진위원장을 맡아 앞장서고, 경북도민들이 십시일반으로 1만원 이상씩 모금했다. 특히 지난해 윤석열 정부 들어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의 강력한 요청으로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1억5000만원의 국비를 보태면서 동상 추진에 가속도가 붙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다부동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구국의 성지이고, 백선엽 장군은 구국의 영웅"이라며 "도민들의 뜻을 받들어 앞으로 '백선엽 장군 기념관'을 만들고 더 많은 국민이 다부동에 와서 자유대한민국의 소중함을 느끼도록 '호국 메모리얼 파크'를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동상 제막에 앞서 지난달 30일 서울 공군호텔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이 열렸다. 명예 이사장에 추대된 백남희 씨는 "아버지의 호국·구국·애국 정신을 이어갈 참군인을 찾다 보니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바로 그런 분이란 확신이 들어 재단 이사장을 맡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렸다"고 소개했다. 김일성의 남침을 격퇴한 백 장군을 기리는 선양 사업을 이끌 적임자로 북한의 도발에 단호한 응징을 역설해온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맡게 된 것이다.
김 이사장은 "백 장군은 다부동 전투 승리로 전쟁을 수세에서 승세로 일거에 바꿨고, 한·미동맹의 초석을 쌓은 영웅이자 참전 군인의 표상"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백 장군의 숭고한 나라 사랑과 호국 정신을 선양·계승하고, 우리 국민이 대한민국에 자긍심을 갖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인터뷰=임호영 한미동맹재단 회장]

"싱글러브 장군, 웨버 대령 동상도 10월에 세운다"
다부동에 설 백선엽 장군 동상 오른쪽에는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과 해리 트루먼(1884~1972)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상이 정전협정 체결 기념일인 7월 27일 제막식을 앞두고 가림막 뒤에 나란히 서 있었다. 6·25전쟁에서 다부동 전투의 의미와 백선엽 장군의 역할, 그리고 이승만·트루먼 동상이 대부동에 들어서는 의미 등을 듣기 위해 임호영(64·사진) 한·미동맹재단 회장을 인터뷰했다. 육사 38기로 5군단장과 합참 전략기획 본부장,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예비역 육군 대장)을 역임한 임 회장은 한국청소년연맹 총재도 겸하고 있다.

-백 장군의 대표적 업적을 꼽으면.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은 덕분에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할 시간을 벌어줬고 결국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1953년 5월 미국 백악관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에도 기여한 한·미 동맹의 상징적 인물이다. 6·25전쟁을 김일성의 통일 전쟁이라 믿는 종북 세력은 베트남처럼 공산화할 통일 기회를 백 장군이 훼방 놓았다고 여긴다."

-미군 장성들도 존경과 예우가 각별했는데.
"주한미군사령관이 부임하거나 이임할 때면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백 장군을 반드시 초청했다. 휠체어를 탄 백 장군 앞에서 미군 4성 장군들이 몸을 낮춰 눈을 맞추며 인사하는 장면을 여러 번 봤다. 미국의 전쟁 영웅인 더글러스 맥아더, 제임스 밴 플리트, 매슈 B. 리지웨이 등 전우이기도 한 백 장군에 대한 깊은 존경심의 표현이었다."

-3주기를 맞아 다부동에 동상이 세워지는 의미는.
"대한민국을 지켜낸 다부동에 6·25전쟁의 대표적 영웅인 백 장군의 동상을 이제라도 세우니 다행이다. 그런 영웅을 오래도록 기리겠다는 취지니 당연한 도리다."

-27일엔 이승만·트루먼 동상도 세워진다.
"6·25전쟁 때 기적 같은 일이 많았다. 6월 27일 유엔 안보리의 파병 결의, 7월 1일 미군의 신속한 부산항 입항과 28일 지상군 참전 결정 등은 트루먼 대통령의 결심 덕분에 가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9월 30일 맥아더 사령관이 북진을 막자 38선 돌파를 명령했다. 미국의 반대에도 반공 포로를 석방해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끌어냈다. 두 대통령의 동상이 나란히 서게 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

-올해는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다.
"1953년 7월 27일 당시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김일성이 서명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거부했다. 정전체제에서도 북한은 1968년 1·21 사태, 1976년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아웅산과 KAL기 테러,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공격 등 수많은 도발을 자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을 추진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지금도 심리전과 사이버 공격이 계속되는데 정전이 의미 있나."

-문 전 대통령은 『1950년 미·중 전쟁』이란 책을 추천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고, 동족상잔 비극의 발생 원인을 오도하는 잘못된 일이다. 6·25 전쟁은 김일성이 불법적으로 침략해 발생했다. 여기에 공산화를 확대하려던 소련의 의도, 북한과 특수관계이던 중국의 동의가 함께했다. 기밀 해제된 옛 소련과 동유럽 문서 등을 종합하면 김일성의 적화야욕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란 사실이 이미 증명됐다."

-올해는 한·미동맹 70주년의 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던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자 존 싱글러브 유엔사령부 참모장이 '전쟁의 길로 이끄는 오판'이라며 반대했다. 미국으로 소환돼 이듬해 강제 전역했고 미군 철수계획이 백지화됐다. 윌리엄 E. 웨버 대령은 1951년 중대장으로 원주 전투에서 오른팔과 오른 다리를 잃었지만, 대령까지 복무했다. 6·25전쟁을 '잊힌 전쟁'이 아닌 '승리한 전쟁'으로 평가받도록 평생 노력했다. 두 영웅을 기리는 동상을 제작해 오는 10월 임진각 평화공원에 세울 예정이다. 전후 대한민국을 지키는 와중에 희생된 미군 92명의 추모비도 만들 계획이다."

글=장세정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