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0순위 통장
둘째 아이가 태어날 때도 여전히 월세 집을 면하지 못했다. 집은 말 그대로 안식처이고 육신의 쉼터이며 하루의 고뇌와 피곤을 부려놓고 재충전하는 곳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집을 마련하기 위해 근검절약하며 살았다. 그동안 애써 모은 300만원으로 어느 날 드디어 소망하던 주택 청약 통장을 만들었다,
그날 은행원이 건네주는 부금통장을 받아 가슴에 꼭 안아보았다. 벌써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은 듯이 뿌듯했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 추첨 공고가 나왔으나 수차례 이름을 써내어도 당첨이 되지 않고 헛수고만 하였다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오니 집주인이 이사비용을 줄 테니 한 달 안에 집을 비워 달라는 것이다. 이사 들어 온 지 6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당첨만 되면 우리도 집이 생기는데 우리 가족은 당당하게 그 집에 입주하게 되고 그 새집은 우리를 금의환향할 텐데, 한 달이 되자 주인이 다시 찾아와 빨리 비우라고 거친 말투로 재촉하니 어린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 부부의 괴로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남편은 참다못해 어느 분양 사무실을 찾아가더니 가장 싼 집이 있었는데 꼭대기 층이라고 해서 계약했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이제 산꼭대기에서 살게 되었다고 마치 성냥갑을 쌓아 올린 것 같다면서 남편은 집다운 집은 역시 주택이라고 개인 주택에 대한 아쉬움을 말했다.
삼십 사오년 전의 아파트 대출 금리는 너무 높아서 집이 짐처럼 느껴졌다. 집 입주금이 모자라서 대출을 받았는데, 은행 이자 내는 날짜는 얼마나 자주 돌아오는지, 아무래도 돌파구를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좋은 장소를 수소문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압구정 대로변 성수대교 남단에 고급 예식장을 짓는 건물주가 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찾아왔다. 항상 나를 기억하시는 그분의 도우심이며 응답으로 믿어 즉각적으로 계약부터 하였고 남편은 계약한 건축물의 도면을 보더니 최상의 영업권을 가진 고급 장소를 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나를 축하하며 소망하던 최상의 장소라며 더욱 감사했다.
입주 시까지 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까지 마련해야 함에도 전혀 근심되지 않았다. 꿈이 있는 곳에 언제나 길을 열어주셨던 그분의 손길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건물주는 재정 능력이 탁월한 경쟁자들이 있었음에도 그 장소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 적격자를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대상으로 나를 선택했다면서 열심히 노력해서 이곳에서 꼭 성공하라는 덕담을 남겨 주었다. 남편은 구체적인 인테리어비와 장비 등 비용체크부터 하면서 최선 다해 나를 도와주었다,
어느 날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청약통장을 꺼내어 친구에게 0순위 통장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친구는 대뜸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느냐? 그 통장 요새는 금덩어리라고 격려했다. 한 시간 남짓 지나서 친구의 주선으로 개포동에 있는 부동산을 소개받았고 거기서 세금 공제 후 1500만 원이라는 큰 금액을 받기로 약속을 했다. 통장이 남편의 이름으로 되었으니 당연히 자기가 가야 한다며 통장을 달라고 해서 남편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나는 먼저 출근을 했다.
저녁 늦게 돌아온 남편은 기다리던 내게 커다란 주택은행 봉투를 건네주었다. 나는 부랴부랴 봉투를 열었다. “어머! 이게 웬일인가.” 그 봉투는 주택부금 해약통장과 긴 세월 정기예금 이자가 담겨 있었다.
나는 텁석 주저앉았다. 앞이 캄캄했다. 남편의 얼굴이 잔인해 보였다. 눈물이 쏟아졌다. 태산같이 믿었는데 많은 부채를 어찌 감당할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이기에 안 된다는 것이다. 여자들 따라다니며 인감 떼 주고 그들의 심부름 할 수 없으니 억울하면 부동산을 개업하라는 것이다. 은행 빚을 무겁게 졌지만 이미 집을 구했는데 많은 웃돈을 받고 팔면 다른 사람의 당첨 기회를 빼앗는 행위라고 오히려 나를 세속에 물든 여자로 몰아세웠다.
주택은행 직원들까지 일어서서 말리더라고 했다. 이미 부패한 사회로서 질서를 지키며 사는 사람이 왕따 당하는 세상이라고 한숨을 내 쉬었다. 손해 보고 거리낌 없이 살자고 했다.
나는 밤새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줄줄이 지급해야 할 것들이 즐비하기도 했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더더욱 야속한 것은 내가 저속한 여자가 된 것이다. 그 시대 시장 문화이고 부동산 시장의 흐름을 공무원들도 인정하던 시절이었다. 천사표인 내 친구는 그렇게 융통성 없는 사람 처음 봤다며 정신 나간 짓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다음날 남편의 후배가 내 일터를 찾아와 융통성 없는 형하고 사시려면 형수가 고생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대학 후배이면서 긴 세월 인도네시아와 사우디 건설현장을 거쳐 한 시대를 함께 일해 왔다. K후배는 대학 선배인 형을 세종대왕보다 존경한다고 했다. 형은 당연히 불의를 용납하거나 타협 자체를 하지 않는 형이라고 했다. 몇 밤을 새운 후로도 용서가 되지 않아서 괴로웠다.
그는 특별히 자신의 삶 속에서 떳떳하지 못한 이익을 용납하거나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설령 굶어 죽는 일이 있을지라도 비겁하게 구걸하지 않는 훈련이 잘된 남자임을 수차례 경험했으면서도 0순위 통장 해약만큼은 이해가 안 되었다.
내가 식음을 전폐하고 자금 때문에 근심하는 것을 지켜보며 남편은 안타까워했다. 다음날에는 과감하게 집을 팔자고 했다. 자신은 10평짜리 집에서도 당신만 함께 있으면 충분히 행복 하다며 나를 위로했다. 절반은 위로의 말로 절반은 내 사고를 선하게 전환 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여보! 당신은 나를 융통성 없는 고지식한 남자라고 하겠지?”
“그러나 부모인 우리가 정직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자식들에게 의와 불의의 갈림길에서 정직을 식물로 삼고 살라 하겠소?”
“우리가 좀 더 열심히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옳지 않은 것은 손해를 보는 길을 택합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편이시니 우리 앞날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요.”
나는 남편의 아름다운 정신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해 하나님께 무릎 꿇어 회개했다. 그 이후 남편이 더욱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그 이후 의를 따르는 일에는 반드시 먼저 손해를 결단하는 선택에 머뭇거리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수차례 좋은 기회가 찾아와도 그는 늘 제물을 피해 다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직한 결정을 해야 할 때 변명하지 않는 단호한 남편, 숱한 아름다운 교훈과 추억 보따리를 안고 살게 해준 고마운 사람, 우리는 함께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나의 속물근성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남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던 그 날이 엊그제 같다. 아름다운 인생관을 소유한 남편과 함께 살아온 축복을 날마다 감사한다. 그의 따뜻한 미소를 생각할 때마다 행복하다. 결국, 우리는 모두 언젠가 0순위 통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딤전 6:17 상)
<하늘의 순정>
주야로 쏟아지는 빗줄기
무엇을 씻으려고 저리도 세찰까
땅을 흥건히 적시도록 내리는 것은
대지를 향한 순정이다
하늘도 이따금 울고 싶은 걸까
빗물 속에 숨겨진 슬프고도 아픈 사연들,
노아 때부터 이어져 오는 한탄과 눈물
그 무거운 짐을
누가 대신 질 수 있겠는가
웬 재앙이냐?
슬퍼하지 말자
두려워하지도 말자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물
담담히 써 내려가는 눈물의 서사시다
잠잠히 기다려보면 알게 된다
한결같은 하늘의 마음을
그 분의 순정임을 알게 된다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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