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수완 빼어난 횡성, 그런데 왜 하필 한우였을까
[운민 기자]
▲ 횡성한우마을 횡성은 예로부터 강원도에서 가장 큰 우시장이 열렸던 상권이 발달하던 고장이었다. 그걸 바탕으로 가장 먼저 한우 상품화에 앞장선 횡성은 한우의 고장으로 자리매김 했다. |
ⓒ 운민 |
강원도 영서지역에 자리한 고장 '횡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한우다. 물론 횡성에는 앞서 소개했던 만큼 전역에 걸쳐 다양한 이야기가 산재해 있지만, 그 한우가 주는 브랜드가치가 횡성 전체의 인상을 뒤덮을 만큼 그 존재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가 횡성한우에 대해 알게 된 지 수십 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 역사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횡성은 제2의 개성이라 할 만큼 상업이 발달했었고, 그만큼 이곳 사람들도 장사수단이 빼어났다고 전해진다.
횡성사람을 개성사람과 비교하는 재미있는 일화도 하나 전해지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횡성사람과 개성사람이 밤이 깊어 외딴 폐가에서 함께 밤을 지내게 되었다. 횡성 사람은 문에 창호지를 발라 바람을 막았고, 개성 사람은 초를 마련해 방을 밝혔다. 개성 사람은 창호지보다 초가 비용이 덜 드니 내심 돈을 더 아꼈다고 좋아했지만, 날이 밝자 떠나기 전 횡성 사람은 창호지에 물을 묻혀 그것을 떼어갔다. 그런데 개성사람은 초가 이미 다 타버렸기에 가져갈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이 일화처럼 횡성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습에서 장사 수완을 보이며 상권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였고,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곳곳을 수탈할 당시에도 횡성에서만큼은 여러 방법으로 발을 못 붙이게 해 '제2의 개성'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 횡성한우체험관 현재 횡성은 한우와 관련된 체험관을 운영중이다. |
ⓒ 운민 |
이런 횡성이었으니, 그들이 모이는 횡성장은 이른바 동대문 밖에서 가장 큰 장터라 여겨졌다. 그 장날마다 바로 우(牛)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물론 이 곳은 현재 위치가 아니라 원래 구리고개 넘어 섬강변인 뒷내다리 옆에 있었다고 한다. 소뿐만 아니라 돼지도 취급했으며 도축장도 함께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대부분은 장이 열리기 전날 우시장 근처 마방에 소를 맡기고 다음날 소를 끌고 갔다고 한다.
횡성에는 유난히 소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송아지고개, 쇠장골, 소구용골, 소막골 등이 있고, 이 고장 전역에 두루 퍼져 있다. 우시장에는 수집상, 중개상, 채꾼 등 다양한 상인들이 종사하고 있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모든 상행위가 이루어져 왔다.
▲ 읍하리 석불좌상 횡성군청 뒷편 언덕에는 읍하리석불좌상과 읍하리삼층석탑이 있다. |
ⓒ 운민 |
현재 횡성에서 한우를 먹으려면 읍내에 위치한 횡성시장과 영동고속도로 새말 ic에서 가까운 우천 횡성한우마을에 가면 된다. 도회지에서 먹는 것보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품질 좋은 한우를 즐길 수 있으며, 주변의 설렁탕집에서는 진한 농도의 국밥 또한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근처에 자리한 횡성한우체험관에서는 횡성한우에 대한 정보와 함께 아이들과 소소한 체험이 가능하다.
한우를 맛볼 만큼 충분히 맛봤으니 이제 횡성읍에 자리한 문화유적을 천천히 산책하면서 둘러보기로 했다. 전천과 섬강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횡성읍은 소박하지만 깔끔한 강원도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다. 횡성시장을 뒤로하고 야트막한 언덕길을 조심스레 올라가면 단정한 모습의 성당이 우리를 반겨준다.
▲ 운암정 섬강을 마주보고 있는 운암정은 이 지역출신의 김종운, 이원직에 의해 건립되었다. |
ⓒ 운민 |
이곳을 내려와 이번엔 횡성군청 뒤편 보훈공원을 향해 올라가 보기로 하자. 공원의 초입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몇 개의 문화재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횡성의 다른 지역에서 욺 겨온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은 화려하진 않지만 이 지역의 정서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섬강을 건너 강 아래를 바라보는 곳에 운암정이란 정자가 변함없이 우뚝 서있다.
1937년 이 지역 출신인 김종운, 이원직 두 사람의 자수성가를 기념해 지었다는 이곳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 양식의 제법 화려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정자 주위에는 출입을 막는 담벼락이 쳐져 있었다. 온전히 이곳의 경치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 풍수원성당 풍수원성당은 강원도 최초이자 한국인 사제에 의해 지어진 첫 성당이기도 하다. |
ⓒ 운민 |
이제 횡성의 마지막 답사지인 풍수원 성당으로 떠나보도록 하자. 서원면에서 양평으로 가는 길에는 유난히 캠핑장과 펜션촌이 눈에 띈다. 수도권과 비교적 근접한 이유도 있겠지만, 이 일대를 바라보면 산과 그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의 자태가 아늑함을 주는 듯하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이곳에는 1801년 천주교도들을 탄압한 신유박해 이후 수십 명의 신자들이 풍수원마을에 모여 정착해 조용히 신앙활동을 이어왔다. 종교박해가 끝난 이후 1890년 프랑스인 르메르 신부가 초대 신부로 이곳에 온 이후 성당은 날로 번성해 강원도 전역과 경기도 일부를 포함하는 12개군 29개 공소를 거느렸고, 신자수는 2000명에 이르는 규모로 성장했다고.
이후 예수성심학교 출신으로 첫 사제로 서품 된 정규하신부가 부임하여 1906년 초가성당을 대신에 지금의 성당을 건립한다. 풍수원성당은 강원도에서 첫 건립된 성당이고,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성당으로도 꼽힌다. 예나 지금이나 작은 마을인 풍수원에 이처럼 큰 성당이 들어서게 된 이유다.
명동성당, 전동성당의 외관처럼 붉은색 벽돌이 인상적인 이 성당은,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지만 뒤편의 언덕에는 새로 복원된 초가성당이 그리고 뒤편에는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사제관과 함께 돌아볼 만하다. 석양을 바라보며 이만 횡성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경기별곡 시리즈가 완간되었습니다. 기고, 강연 문의 ugzm@naver.com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외교부 '공탁' 효과? '역사정의 시민모금' 1억 돌파
- 광주지법, 일제 강제동원 관련 정부 공탁 '수리 거부'
- IAEA 사무총장, 일 외무상과 회담... "최종 보고서 오후 공개"
- '상저하고' 외치던 정부, 결국 성장률 1.4% 낮췄다
- "8만명 밥벌이가 걸렸다"... 전기차 늘어날수록 불안한 사람들
- 이상하고 수상한 '이장'의 세계
- 배달비는 계속 오르는데 라이더들이 먹고살기 힘든 이유
- 3년 만에 퇴직금 소송 이긴 전직 조연출 "방송계 변했으면"
- 사교육업체와 업무협약 체결한 충북교육청... 일각선 우려
- 윤 대통령 "수출 확대 전력, 세일즈 외교 뒷받침 잘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