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왜 70년 만에 일본의 부조리를 따라 했을까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3일 외교부가 공개한 보도자료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관련 공탁 실시' |
ⓒ 외교부 |
3일 외교부는 "지난 3월 6일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관련 해법 발표 이후, 정부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함께 피해자 기준 총 15명의 피해자 또는 유가족을 대상으로 정부 해법 및 그간의 경과에 대해 상세히 설명드리고 이해를 구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일본의 사과와 직접 배상을 촉구하며 수령을 거부하는 피해자 4명에 대해 공탁이 개시됐다고 밝혔다.
"재단은 금 7월 3일 그간 정부와 재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판결금을 수령하지 않거나 사정상 수령할 수 없는 일부 피해자·유가족 분들에 대해 공탁 절차를 개시하였습니다. 대상자인 피해자·유가족 분들은 언제든지 판결금을 수령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을 끌고 가 강제노동을 시킨 뒤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쪽은 한국 정부가 아니라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다. 일본 측은 배상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전범기업은 더욱더 그렇다. 이들은 일본 정부 뒤에 숨어 문제가 봉합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한국 정부가 배상책임을 떠안겠다고 나선 데 이어, 피해자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공탁제도까지 활용하고 있다. 피해자가 금전을 수령하지 않거나 수령하기 힘든 경우에 공탁이 활용되지만, 강제징용 문제에서는 공탁이 전혀 다른 목적으로 활용됐다.
일본은 피해자들에게 돈을 지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이 제도를 활용했다. 그런 역사가 있는 공탁 절차를 윤 정부가 70여 년 만에 재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징용이 패망 이전의 일본이 저지른 죄과라면, 강제징용 공탁은 패망 이후의 일본이 저지른 또 다른 부조리다. 윤석열 정부의 공탁은 그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공탁은 패망 직후의 일본처럼 이 문제를 은폐하는 데 치중하는 윤 정부의 정서를 보여준다.
징용 문제 봉합하고자 공탁 진행
2014년에 <동북아역사논총> 제45호에 실린 이상의 인천대 초빙교수의 논문 '해방 후 일본에서의 조선인 미수금 공탁 과정과 그 특징'은 국내 학계의 연구 결과들을 근거로 "1945년 8월 해방 당시 일본에는 200여 만 명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라며 "그중 125만 명 정도는 일제 지배 말기인 아시아·태평양 전쟁기에 일본 국내로 강제동원된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한다.
일본은 징용 피해자들에게 봉급은 물론이고 숙식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그런 일본이 패전을 맞이한 상태에서, 125만 정도의 피해자들이 체불 임금과 배상을 요구했다. 이는 일본을 점령한 더글라스 맥아더 휘하의 미군 못지않게 일본이 두려워할 만한 일이었다. 한국인들로 인해 치안이 혼란해질 가능성과 이들이 한꺼번에 임금을 청구할 가능성을 일본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일본의 대처법 중 하나는 연합군최고사령부(GHQ 혹은 SCAP)의 공조와 지시하에 징용 피해자들을 신속히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1947년 9월 24일 자 <경향신문> 기사 '해방 후 귀환 동포 2백만'에 인용된 미군정청 남조선과도정부 외무처의 통계에 의하면, 그해 7월 31일까지 일본에서 귀환한 한국인은 110만 6220명이다. 재일 한국인의 절반 이상이 징용 피해자였으니, 110만 명의 상당수가 그런 피해자였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양금덕 할머니는 15세 때인 1944년에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강요당했다. 이듬해 10월 그는 "너희들의 고향집 주소를 알고 있으니 틀림없이 월급을 보내주겠다"는 회사의 약속을 받고 귀국했다.
이런 거짓 약속과 더불어, 공권력을 동원한 GHQ의 귀국 조치는 한국인들을 신속히 돌려보내는 결과를 낳았다. 미·일의 합작이 없었다면, 그 많은 피해자들이 임금조차 받지 않은 채 귀국하는 일이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귀환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 결성돼 있었고, 한국인 상당수는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잔류했다.
워싱턴을 출발한 이승만이 도쿄에 도착한 날인 1945년 10월 14일, 재일조선인연맹(재일본조선인연맹)이 결성됐다. 2021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재일조선인단체 사전 1895~1945>는 "일본 패전 전까지 지속적인 억압 체제 속에 있었던 조선인들은 해방 직후 자발적으로 각지에서 조선인 단체를 결성했고, 이들 단체들이 통합해 전국 조직화한 것이 1945년 10월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이었다고 서술한다.
일본과 미국은 징용 피해자 상당수를 귀국시켰지만,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강력한 조직이 일본에서 결성됐다. 이랬기 때문에 징용 피해자들의 임금 문제는 언제라도 크게 부각될 수 있었다.
그런 가능성에 대비하는 한편, 징용 문제를 확실히 봉합하고자 안출된 방안이 공탁이었다. 전범기업들과 일본 정부는 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서 피해자들을 찾아 임금을 지급하기 곤란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탁 절차를 진행했다. 그런 뒤 공탁 기간 10년 만료를 이유로 피해자들의 권리를 소멸시켰다. 이는 훗날 한국인들의 법정 투쟁에서 족쇄로 작용했다. 일본 법원은 권리가 소멸됐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 지난 2018년 대법원의 배상 확정 판결을 받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들의 법률대리인인 김세은,임재성 변호사가 3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외교부 건물 앞에서 배상금 수용 거부에 따른 정부의 공탁 절차 개시에 대해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앞서 정부는 2018년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총 15명의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일본 피고기업 대신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재단)이 지급한다는 제3자 변제 해법을 지난 3월 6일 발표했으나 원고 중 생존 피해자 2명과 사망 피해자 유족 2명 등 4명은 수용 거부 입장을 유지해왔다. |
ⓒ 연합뉴스 |
"1950년 2월 GHQ의 지시에 따라 일본 정부는 '국외거주 외국인 등에 대한 채무변제를 위한 공탁의 특례에 관한 정령'과 그 시행에 관한 명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인 군인·군속과 징용 선원 등의 미수금이 동경 법무국에 공탁되었고, 그동안 조사만 되고 공탁되지 않은 민간 기업들의 미불금, 기존에 지방 법무국에 공탁되어 있는 공탁금의 일부, 1946년 GHQ가 홋카이도 지역에서 예탁시킨 조선인 임금 등 미불금의 예탁금 등도 동경 법무국에 공탁되었다."
이 같은 공탁은 한국인 피해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효과를 거뒀다. 이는 공탁금을 납부한 전범기업들에게도 이익을 안겨주었다. 전범기업들은 실제보다 훨씬 적은 액수를 공탁함으로써 피해자들의 임금을 실질적으로 가로챘다. 공탁(供託)이 아니라 공탁(空託)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교수의 논문은 "공탁금의 절대 액수도 실제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전범기업들은 체불 임금을 사내에 유보하는 한편, 강제징용 문제로 인한 법적 부담에서 크게 벗어났다.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의 소재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공탁을 실시했지만, 거짓말이었다. "너희들의 고향집 주소를 알고 있으니"라는 말을 양금덕 할머니에게만 했던 것이 아니다. 다른 피해자들의 연락처도 다 알고 있었다. "공탁 보고서에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본적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이상의 교수의 논문은 지적한다.
일본은 미군정이나 한국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얼마든지 임금을 지급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피해자들과 한국 정부에 알리지도 않고 공탁을 진행한 뒤 시곗바늘이 빨리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전에도 한일 간 교류가 있었다. 1951년 10월 20일에는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이 도쿄에서 거행됐다. 이런 기회를 빌려 공탁금 문제를 이슈화시킬 수 있었지만, 일본은 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을 일일이 상대하기가 번거롭다면 한국 정부의 협조를 구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 했다.
윤석열 정부가 착수한 공탁이 피해자들의 돈을 떼먹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일본이 했던 공탁과 다를 바 없다. 일본이 했던 공탁은 강제징용 범죄를 법적으로 확실히 은폐하는 한편 전범기업들의 재정적 형편을 봐주기 위한 것이었다. 윤석열 정부가 이런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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