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 고전을 16개의 주제로 탐색한 결과물

안치용 2023. 7. 4.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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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오디세이아 - 광인의 복화술과 텍스트의 오르가슴'을 내고

'책이 나왔습니다'는 저자가 된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자 혹은 편집자도 시민기자로 가입만 하면 누구나 출간 후기를 쓸 수 있습니다. <편집자말>

[안치용 기자]

서시(西施)는 중국에서 미녀의 표본으로 꼽히는 춘추시대 말기 인물이다. 오왕(吳王) 부차에게 패배하여 3년을 그의 시중을 들다가 귀국한 월왕(越王) 구천은 와신상담하며 복수를 도모했다. 이때 충신 범려 등의 미인계 방책에 따라 전국을 뒤져 찾아낸 여자가 서시이다. 춤과 노래 등을 가르친 후 부차에게 보내자 부차는 서시에 빠져 나랏일을 소홀히 하다가 결국 구천에게 망하고 만다.

서시가 살던 마을이 동서로 나뉘어 있었는데 서쪽에 살았기에 그를 서시라 했다. 어머니를 따라 빨래를 직업으로 삼았다. 서시의 미모는 어려서부터 유명해 심지어 배가 아파 찡그려도 아름다웠다고 한다. 동쪽 마을에 산 동시는 서시가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라했고 찡그리는 것 역시 따라했다.

이를 두고 '효빈(效顰・찡그림을 흉내냄)'이란 단어가 만들어졌다. 또한 찡그린다는 뜻의 '빈축(嚬蹙)'이란 말도 생겼다.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언행을 비유할 때 '빈축을 산다'라고 하는 것의 유래가 된 고사이다. 동시빈축(東施嚬蹙)과 동시효빈(東施效顰)이란 사자성어가 이 고사에서 비롯하였다.
 
  <세계문학 오디세이아- 광인의 복화술과 텍스트의 오르가슴> 표지
ⓒ 르몽드코리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년)는 세계인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화가일 것이다. 37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흐가 사후 자신이이처럼 대단한 명성을 누리게 될 것을 생전에 알았다면 짐작건대 자살하지 않았을 터이고 (아니면 그보다 늦게 자살했을까?) 인류에게 더 많은 작품을 남겼겠다.

가문 대대로 목사를 지낸 집안에서 태어난 고흐는 애초에 그림보다는 신앙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진다. 광적인 신앙 행태를 보여, 곤봉으로 자신의 등을 때리고 겨울에 셔츠만 입고 돌아다니는가 하면 침대를 마다하고 침대 옆 돌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등 고행을 자초했다.

그러나 운명은(혹은 신은) 그를 바울과 같은 전도자가 아닌 화가의 길로 인도했다. 그것도 대단한 화가로. 그림은 고흐에게 일종의 소명이었다. 믿음의 연장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믿음과 그 믿음의 대상인 신은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다. 그렇게 열렬한 신앙을 가진 그가 불안에 휩싸이고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다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다소 모순적이다.

성서 대신 붓을 들어서였을까. 단정할 수 없지만 그렇진 않은 듯하다. 그의 개인적 광기엔 시대의 무게가 얹혀 있다. 고흐는 자본주의가 발흥하는 문턱에서 분열한 근대인의 전형이다.

신이 지배한 서구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년)같은 사상가가 막 신의 죽음을 선언할 무렵에 고흐는 여전히 신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린다. 죽음을 선고받기 이전에 신이 이미 떠나버려 옷자락만 허공에 뜬 깃발처럼 펄럭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적극적 멜랑콜리'를 말한다.
 
"지금, 고향집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나는 이따금 그런 그림들이 있는 고향이 그리워. (…) 향수병에 굴복하는 대신 나는 적극적인 멜랑콜리를 결심했다. 달리 말하면, 우울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절망적인 멜랑콜리보다 바라고 추구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멜랑콜리를 더 중시하겠다는 뜻이야." - <빈센트 반 고흐> , 라이너 메츠거 저, 하지은・장주미 역, 57p, 마로니에북스, 2018
 
이 적극적 멜랑콜리를 중시하는 삶의 전략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수전 손택(1933~2004년)은 우울증을 "멜랑콜리에서 매력을 뺀 것"이라고 정의했다. 손택의 정의에 따르면 멜랑콜리엔 매력이 들어있다. 고흐가 말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절망적 멜랑콜리는 손택의 우울증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적극적 멜랑콜리는 멜랑콜리에서 매력을 곶감 빼먹듯 뽑아내는 작업이 되는 셈이다. 매력이 소진하며 멜랑콜리는 우울증을 거쳐 광기로 휘발한다.
문학 또한 고흐의 창작처럼 산출된다. 텍스트에 매력을 부여하기 위해 작가는 멜랑콜리와 대면하고 대결한다. 문학에서 또한 예술에서 매력은, 재능 감각 등 여러 어휘로 설명하는 작가의 역량과 연결되어 작품 수준을 결정 짓는다. 분명한 것은 멜랑콜리를 제거한 '매력'만으로는 더는 예술을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 빈센트 반 고흐
 
고흐의 삶에는 물론 그의 작품에도 도저한 멜랑콜리가 매력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고흐의 불멸성을 만들어낸다. 이 책에서 다룬 많은 작가도 마찬가지다. 멜랑콜리와 대치하면서 멜랑콜리에 패퇴하지 않고, 또 멜랑콜리를 박멸하지 않고, 멜랑콜리를 매력으로 버무려 요리해내는 신박한 재주를 부린다.

그러나 그 작업은 대체로 고공(高空) 줄타기에 가깝다. 그 일을 무던하게 해내는 작가는 드물다. 서시처럼 타고난 것을 활용하여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광기의 고흐에게 적극적 멜랑콜리라는 줄타기는 더 가혹한 것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파괴당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말을 고흐에게 적용하면 그 적수가 멜랑콜리가 아닐까.

헤밍웨이는 무엇으로부터 파괴당하고 패배하는지, 그 적수 혹은 상대를 특정하지 않았다. 삶을 버텨낸 기간은 두 사람이 다르지만, 같은 방식으로 삶을 끝낸 두 작가의 영혼을 갉아먹은 게 멜랑콜리였음을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겠다.

멜랑콜리라곤 개입할 여지가 없는 서시와 관련한 단어 중에 '침어(沈魚)'라는 게 있다. 서시가 시내에 빨래하러 오면 시냇물에서 헤엄치던 물고기들이 그에 미모에 넋을 잃고 바닥으로 가라앉았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전한다. 침어는 '가라앉은 물고기'가 아닌 '물고기도 가라앉힌다'라는 뜻으로 효빈과 달리 서시의 미모를 직접 지목한 말이다.
 
  Wheatfield_with_crows
ⓒ 민헨트 반 고흐
 
고흐나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같은 작가 또한 침어이다. 그들은 독자를 텍스트의 바닥으로 가라앉혀 의미와 감성, 나아가 모종의 통찰에 침윤하게 만드는 타동사의 침어이다. 동시에 그들 중 많은 수가 자동사의 침어이다. 독자를 그곳에 가라앉히는, 정확하게 말해 그곳으로 안내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가라앉곤 했다. 침잠과 부상을 반복하다가 일부는 그곳에서 다시 떠오르지 못했다.

이 책은 사랑, 근대, 구원 등 16개 주제로 누구나 동의하는 세계문학 고전을 종횡무진 휘저어 탐색한 결과물이다. 침어 중의 침어 고흐의 그림과 함께 하는 문학의 여정이 독자에게 흥미로운 경험이 될 듯하다. 소설 같은 글이 아니기에 책을 읽을 때 앞에서 뒤로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본문에 배경으로 흐릿하게 사용한 고흐의 그림을 권말에 별도로 수록했으니 따로 눈 호강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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