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청산 모범국' 독일이…극우 지자체장 2명 당선, 무슨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독일’의 과거와 단절하면서 '과거 청산의 모범국'으로 꼽혔던 독일에 극우 정당의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선거 결과 소도시 2곳의 지자체장에 극우정당 후보가 당선됐고, 내년 선거엔 주요 도시에서도 당선자를 배출할 가능성이 높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나왔다.
2일(현지시간) 독일의 극우 정당 ‘독일을위한대안’(AfD) 소속 하네스 로스 후보가 구(舊) 동독 지역인 작센안할트주(州)의 작은 마을인 라건-제스니츠에서 치러진 지자체장 선거에서 무소속인 닐스 나우만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앞서 일주일 전인 지난달 25일엔 튀링겐주 조네베르크에서 AfD의 후보 로버트 세셀만이 지자체장에 당선돼 논란이 일었다.
도이체벨레(DW)는 이날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극우 정당이 거둔 가장 큰 성공”이라며 “두 지역구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지만, 이번 승리는 최근 독일 전역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이 반영된 결과로 주류 정치권과 언론을 초조하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반 유대, 반 난민 내세운 극우 급부상
나치 과거사로 극우 정치 세력에 극도로 민감한 독일에서 종전 78년 만인 최근 반(反) 이슬람, 반 난민, 반 유대주의, 반 녹색 정책을 표방하는 극우 세력이 급부상하고 있다. 독일 유대인 중앙위원회의 유제프 슈스터 회장은 “절대 용납해선 안될 '댐'이 무너졌다”고 우려했다. 기성 정당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리카르다 랑 녹색당 공동대표), “중도에 있는 모든 정당에 대한 경종이자 재앙”(노버트 뤼트겐 기독민주연합 의원)이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AfD가 내년 튀링겐·작센·브란덴부르크 등 주요 도시에서 치러질 주 선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둘 것이란 결과가 나왔다. 이를 두고 알자지라는 “세 선거구에서 AfD가 ‘명확하고 일관된 우위’를 유지 중”이라고 전했다.
AfD 소속 정치인 뵈른 회케는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며 '정치적 지진'을 예고했다. 독일은 16개의 연방 주들이 지역 분권 정치를 실현하고 있어, 각 주의 선거는 연방선거 못지않게 중요하다. 앞서 여론조사기관 도이칠란트트렌드가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1일까지 실시한 조사에선 AfD의 지지율은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을 뛰어넘었단 얘기다.
2013년 출범한 AfD는 독일 연방헌법수호청(BfV)의 감시를 받는 독일 내 우익 극단 조직 중 하나다. BfV는 AfD 회원 2만8500명 중 1만여 명을 극단주의자로 분류했다. 지난해 12월 독일에서 무장 쿠데타를 모의했다 체포된 극단주의자 25명 중에도 AfD의 하원의원 출신이 포함됐다. 과거 회케는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수치의 기념비”라고 표현해 기소됐고, AfD 회원들은 독일 민족의 우월주의도 공공연히 드러내왔다.
국민 설득 부재, 동독 오랜 차별이 극우 온상
전문가들은 AfD가 독일 중도층까지 포섭하며 급부상한 원인으로 ▶독일의 경제 불안 ▶기성 정당에 대한 실망 ▶통일 후 30년 이상 이어진 동독 소외 등을 꼽았다. 현재 독일은 제조업에서 디지털 전환의 더딘 속도, 인구 감소에 따른 노동력 부족 등으로 경기 침체에 빠진 상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5년 이후 작년까지 미국의 1인당 생산성은 8% 올랐지만, 독일은 2% 성장에 그쳤다.
여기에 2015년 시리아 난민, 지난해 우크라이나 난민 등이 대거 유입돼 독일 내 이주민 수는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만하임 대학의 우익 포퓰리즘 전문가 데니스 코헨은 “AfD는 격변기를 살아가는 독일인들의 경제적 불안감, 사회적 배제에 대한 두려움을 먹고 성장 중”이라고 설명했다.
또 숄츠 총리가 이끄는 ‘신호등 연정’(사민당·녹색당·자민당)이 기후 정책 등에서 엇박자를 내면서 민심 이반을 자초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분석했다. 특히 올 초 독일 정부가 갑작스럽게 ‘석유 보일러’의 생산을 단계적으로 중단하고 재생 에너지로 구동되는 열 펌프로 전환하겠다는 ‘보일러법’을 내놓으면서 녹색당과 자민당이 극심하게 분열했던 게 국민의 반감을 산 결정적 계기로 꼽힌다. FT는 “기성 주류 정당이 사회 변화의 방향과 계획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내부 싸움에 몰두했다”면서 “특히 보일러법은 AfD 재도약의 핵심 요인이 됐다”고 전했다.
통일 후 30년이 넘도록 동독과 서독 간 경제 격차를 해소하지 못한 상황도 AfD이 자라는 '온실' 역할이 됐다. 좌파당 소속 정치인인 보도 라멜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서독과 동등한 수준의 경제 상황에 도달하지 못한 구 동독 주민들은 베를린의 주장보다 AfD의 선동적 정책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며 “독일의 진정한 통합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도 구 동독은 통일 후 개발에서 지속적으로 소외되면서 낮은 고용률과 경기 침체로 주류 정치에 대한 반감을 키워왔다고 지적했다.
극우 차단 '방화벽' 무너질까
아직까지 AfD는 주류 정치에서 배제된 상태다. 독일의 기성 정당들은 극우인 AfD와의 연정을 거부하는 ‘방화벽’을 구축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최근 이 방화벽에 균열이 보이고 있다고 알자지라는 전했다. 실제로 기민련의 마이클 브라이시 튀링겐주 위원은 “AfD에 소속된 모든 사람이 파시스트인 것은 아니다”면서 AfD와의 협력 가능성을 제기했다. 기민련에선 독일 헌법에서 망명권 없애야 한다며 AfD의 극우 정책에 발맞춘 듯한 발언까지 나왔다.
폴리티코는 “유럽연합(EU) 최대 경제국에서 극우 세력의 부상은 이민자 유입, 인플레이션, 녹색 정책 시행 등이 포퓰리즘을 어떻게 강화하는지에 대한 경고”라고 전했다. 특히 AfD의 급속한 성장세는 독일의 ‘나치 역사’ 등으로 주변국의 불안 요소이기도 하다. 다만 유로뉴스는 AfD의 급부상이 과거 나치즘과 같은 극단주의의 부상과는 차이가 있다고 전했다. 매체는 “AfD 지지자의 대다수는 극우 정책에 납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류 정당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전했다. 숄츠 총리는 “극우 봉쇄를 위한 연대 구축하고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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