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가난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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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이 넘은 아버지는 아직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다.
오전 7시에 시작하는 일인데, 같이 일하는 사람 대부분이 오전 6시면 모인다고 한다.
"잠은 일찍 깨고, 하릴없이 집에 있느니 일찌감치 길을 나서는 거지. 시간은 넘쳐나고 소일거리 없는 마당에 이거라도 어디냐"고 말한다.
한국인은 누구보다 길게, 오래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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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이 넘은 아버지는 아직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다. 한 달에 10번, 하루 3시간짜리 공공근로를 한다. 최저임금에도 못미치는 시간당 9000원을 받는 일자리이지만, 구청에서 신청을 받을 때면 경쟁이 치열하단다. 오전 7시에 시작하는 일인데, 같이 일하는 사람 대부분이 오전 6시면 모인다고 한다. “잠은 일찍 깨고, 하릴없이 집에 있느니 일찌감치 길을 나서는 거지. 시간은 넘쳐나고 소일거리 없는 마당에 이거라도 어디냐”고 말한다.
시간이 남아돈다고 하지만, 사실 아버지의 시간은 풍족하지 않다. ‘가난한 시간’을 살아왔고, 살고 있다. 긴 시간 자영업자였고, 가게를 그만둔 뒤에는 자영업자의 고용원으로 지냈다. 제법 먼 지역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자식들이 다 커서 독립했는데도 일에서 손을 떼지 않는 건, 돈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쉴 줄 몰라서다. 평생을 장시간 노동에 바치면서 자신을 위한 시간, 쉼과 놀이를 위한 시간을 써 본 적이 거의 없어서다. 어렵사리 손자들과 가족여행을 계획해도 출근해야 한다며 어머니만 보낼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에 아버지는 언제나 일을 하느라 바빴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위해 쓸 시간이 늘 부족했다. 아버지가 스스로에게 주는 시간은 오로지 등산뿐이었다.
그 시절의 아버지 나이를 지나쳐온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리 줄여 잡아도 1주일에 5일, 하루 10시간가량을 ‘회사 인간’으로 산다. 아등바등 시간을 확보한다고 해도, 가족 특히 아내에게 주는 시간은 늘 모자란다. 늦은 결혼을 하고 20년을 거치는 동안 가사·육아노동에 참여하려고 애를 썼지만, ‘동업’ 혹은 ‘분업’이 아니라 ‘간헐적 보조’나 ‘방관’에 머물렀다. 그나마 주말을 맞아 청소·설거지·빨래에 몰두하는 건 아주 잠깐의 눈속임일 뿐이다. 아버지에 이어 나도 ‘시간 빈곤자’인 셈이다.
그리고, 이건 우리 부자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국인은 누구보다 길게, 오래 일한다. 한국행정연구원에서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한국에서 취업자의 연간 실노동시간은 2021년 기준으로 1915시간에 이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1716시간)보다 200시간가량 길다. 미국인은 1791시간, 일본인은 1607시간을 일한다. 우리보다 더 길게 일하는 나라는 멕시코(2128시간)였다. 비슷한 통계는 또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연령별 주당 근무시간(2020년 기준)은 50~59세에서 42.6시간이고 40~49세 41.9시간, 30~39세 42.3시간, 20~29세 38.5시간이다. 65세 이상의 경제활동 참가율(2022년 기준)은 35.3%다. OECD 평균(15.3%)을 훌쩍 넘어서는 수치다.
밥벌이 노동에 많은 시간을 투입하면, 일과 가정의 양립은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의 영역으로 돌입한다. 지난 3월 ‘주69시간 근무제’ 논란이 불거지자 외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청년층에서 반발하는 목소리를 전하면서 장시간 근로가 저출산을 부추긴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레이 쿠퍼 시드니대 교수의 말을 실었다. “장시간 노동은 일과 육아의 충돌로 이어져 저출산과 직결된다. 한국은 노동시간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고, 이는 자랑이 아니다.”
저출산을 잉태한 불씨는 한두 개가 아니다. 다만 ‘시간의 빈곤’도 여기에 한몫을 한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정부는 노동개혁을 포함한 3대 개혁에 강하게 힘을 싣고 있다. 그러나 한 차례 홍역을 치른 근로시간 개편은 방향을 잃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 국민연금 적자구조 개선, 공교육 정상화 등 어느 하나 급하지 않은 게 없기는 하다. 그래도 근로시간 개편을 마냥 미룰 수 없다.
김찬희 산업1부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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