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있는 지구촌 보듬은 주역… 역사 뒤편에 감춰져 안타까웠죠”
2015년 스위스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CC) 문서보관소 내 지하창고. 당시 WCC 인턴으로 한국 관련 자료를 찾던 한 제네바대 석사 과정생의 눈에 구석진 곳의 서류상자가 들어왔다. 작성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미정리 자료’로 분류된 이들 서류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난민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기독 여성의 활약상이 담겨 있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여성의 역사가 이 상자처럼 아직도 감춰져 있구나. 나라도 이들의 이야기를 발굴해보자.’ 김은하(56) 장로회신학대(장신대) 역사신학 객원교수가 당시 한 생각이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WCC 지하창고에서 마주한 이야기를 토대로 박사 논문을 작성했다. 이 논문을 보완해 나온 책이 지난해 출간된 ‘생명문명 시대를 연 20세기 기독 여성 지도자’다. 수잔 데 디트리히(1891~1981)와 마들렌 바로(1909~1995) 등 전쟁 범죄와 인종·여성·장애인 차별에 맞서 싸운 기독 여성 5인을 조명했다.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는 기독 여성사 연구에 천착하는 김 교수를 지난달 30일 서울 광진구 장신대 북카페에서 만났다.
부산장신대를 거쳐 스위스 유학 후 장신대에서 역사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세계 교회 경험이 풍부한 편이다. 세계선교협의회(CWM)와 세계개혁교회커뮤니언(WCRC) 후원으로 잠비아와 미국 미시간주에 각각 신학 연수를 다녀왔다. WCC 부산 총회에선 한국준비위원회 소속으로 행사 기획을,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CCA)와 세계선교학회(IAMS) 등 국제 기독 단체와 학회에선 발표자로 두루 참가했다.
국제무대를 체험하고 교회사를 연구하며 그가 느낀 건 기독 여성의 공헌이 기독교사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20세기 초엔 전장에 나간 남성을 대신해 여성이 세계 선교의 중추를 담당했음에도 이들의 업적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세기 초 파송된 해외 선교사 절반 이상이 여성입니다. 전쟁도 이유가 됐지만 가부장적이던 당시 서구 교회 문화 탓도 있습니다. 자국 교회에서 기회를 주지 않아 해외로 나간 여성 선교사가 적잖았거든요. 이들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국에 어린이와 여성을 위한 교육·의료기관을 설립하며 세계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은 기록은 전파되기도, 계승되기도 힘들다. 그렇기에 “현대 기독교 여성운동은 대표적 연구 소외 분야”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여성이 없던 역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간 기독 여성의 이야기가 숨겨진 건 이들이 여성보다는 ‘학생’이나 ‘선교사’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회운동을 펼친 학생이나 선교사라고 하면 보통 남자를 떠올린다는 것이죠. 여성이란 특성을 짚지 못하면 여성의 관점으로 약자를 돌보고 이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힘쓴 여성 선교사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20세기 기독 여성’을 박사 논문 주제로 정하면서 그의 관심은 기독교여자청년회(YWCA)로 옮겨갔다. 20세기 주요 여성 교회 지도자에겐 YWCA 활동을 하며 국제적 인맥을 쌓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 교수는 WCC 인근의 스위스 제네바 YWCA 본부를 찾아 문서보관소에 남겨진 20세기 여성 지도자의 기록을 찾아냈다. 이때 연구를 바탕으로 그는 ‘8·15 해방 이후 한국YWCA 기독여성운동’ 등 국내 기독 여성 관련 소논문 2편을 발표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20세기 기독 여성이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2차대전 후 YWCA 실행위원회에서 폴란드 여성은 독일 여성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했습니다. 신앙으로 역사를 극복한 이들은 세계의 아픔을 위해 손을 맞잡기로 결의합니다. ‘울고 있는 세계를 치유하는 책임적 존재’로 기독 여성의 역할을 정의한 거죠.”
이 결의 이후 세계YWCA가 지원한 첫 국가가 한국이다. 세계YWCA는 각국 기독 여성의 후원금을 모아 피난민 구호에 나섰고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과 협력해 전후 복구에도 참여했다.
세계 기독 여성사를 연구하는 그의 입장에서 본 한국교회 현실은 어떨까. 김 교수는 “세계 속 한국교회의 위상은 굉장히 높아졌지만 여성 분야에선 아직 취약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양질의 인적 자원과 풍부한 물적 자원으로 세계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도 여럿 배출한 한국교회이지만 여성 지도자 양육엔 관심이 덜하다는 것이다.
“세계 교계는 교단 총회 시 성별과 지위, 인종과 나이를 고려해 총대를 선발합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총회를 열면 대부분 남성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면에선 아직 ‘글로벌 스탠다드’와는 거리가 먼 셈이죠.”
김 교수는 앞으로도 미발굴된 국내외 기독 여성 역사를 정리하고 알리는 일에 주력할 계획이다. 기독 여성의 역사를 후대에 전하는 게 곧 평등하고 공정한 교회 문화 정착에 기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성이 교회에서 종속적 역할만 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연구를 중점적으로 하려 합니다. 역사 속 기독 여성의 헌신을 새로이 조명해 한국교회에 울림을 주는 신학자가 되겠습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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