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일제 식민사학 극복 노력…후학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역사학자 한영우·강만길 교수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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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우 교수, 조선은 중세와 근대 사이의 ‘근세 시대’ 주장
강만길 교수 “조선 안에 근대 자본주의로 가는 힘 있었다”
식민사학의 한국사 정체론 부정, 한국사의 보편성 주목
21세기 급변하는 세계…한국학 연구는 어디로 가야 하나
」
조선이 노예제 사회라고?
팔레 교수에 따르면 조선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한 왕조가 아니라 고려시대로부터 진보를 이룩하지 못한 귀족사회였다. 그의 스승이었던 와그너 교수는 평생을 한국의 족보에 대해 공부했고, 그 결과 과거 시험 급제자가 몇 개 가문에 집중됐다는 사실을 밝혔다. 조선의 신분제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만큼이나 공고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울러 조선이 발전하지 못했던 데에는 동아시아의 조공 외교체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제도가 주변국의 안보를 담보하고 있었기에 중국 주변국은 스스로의 안보를 지킬 필요성을 인식할 수 없었고, 이는 결국 19세기 말 중국의 쇠퇴와 함께 한국과 베트남이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됐다는 시각이다. 1894년 동학 농민봉기 때 조선 정부가 청에게 진압을 요청했고, 이는 청·일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팔레 교수의 글은 국내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자랑스러운 한국 역사를 폄하하기 위한 불순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버드에서 연구할 때 한국은 단지 중국과 일본의 일부였기에, 그 스스로 중국학, 일본학 교수로부터 한국 연구를 지도 받아야 했다. 그는 한국학을 독립시키기 위해 글을 썼다고 밝혔다.
신분제와 자본주의 맹아론
또 하나 그가 주목한 것은 한국 학자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조선시대에 대한 평가가 있었다. 하나는 조선시대를 근대사회와 비슷한 합리적 관료제 사회로 보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에 이미 근대 자본주의적 맹아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이었다.
팔레 교수의 글 이전에 이미 신분제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팔레의 스승이었던 와그너 교수와 한영우 교수 사이에 조선시대 신분제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와그너 교수는 양반·중인·양인·천민의 신분제가 조선시대 내내 공고하게 유지되었음을 주장한 반면, 한영우 교수는 조선시대를 양인과 천민만이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양천제 사회였고, 양반은 양인들 사이에서 합리적 관료제도를 통해 등용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조선은 중세와 근대 사이에 존재하는 ‘근세’시대였다.
팔레 교수는 조선 후기의 실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북학파를 제외한 실학자들이 서양의 근대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고대 유학의 이상사회로 돌아가려 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강만길 교수와 김용섭 교수에 의해 제기되었던 자본주의 맹아론은 실학의 이론과는 맞지 않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논의는 식민지의 유산을 통한 한국 자본주의의 형성이라는 주장으로 연결됐다.
한영우와 강만길의 고민
모두 20년 이상 지난 논쟁인데 왜 이런 이슈를 다시 제기하는가. 이제 한국 학문의 수준, 그리고 한국의 위상이 바뀐 시점에서 한국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조명받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어떤 한국의 역사를 세계에 보여주어야 할 것인가.
식민지의 역사를 거친 한국에서 한영우와 강만길 세대의 고민은 제국주의에 의해 왜곡된 한국 역사를 보편적 역사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식민지화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조선를 폄하했고, 한국을 영구히 일본의 일부분으로 만들려고 했다.
서구 유럽의 중세와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근대를 위한 발걸음을 조금씩 진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한영우 교수와 강만길 교수의 출발점이었다. 일본에 의해 강점당하지 않았더라도 한국 사회는 근대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스스로의 힘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재적인 발전을 찾고자 했고, 이를 통해 식민사학을 극복할 수 있었다.
다시 세계사적 보편성으로
서구 유럽의 역사 연구로부터 한국에 대한 연구로 방향을 틀었던 외국의 역사학자들 생각은 달랐다. 마르크스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주장하고, 막스 베버가 유학에 대해 비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발전이 늦었던 한국과 아시아 국가들의 역사를 서구 역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팔레 교수는 결코 부정적인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국학을 독립된 지역학으로 세우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하필 부정적인 면만 부각했는가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근세나 자본주의 맹아론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 그리고 일본에서도 나타났던 주장이었다. 오히려 지금 팔레 교수의 영향을 받았던 외국 학자들은 조선시대를 ‘빠른 근대(early modern)’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근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올해 한영우 교수와 강만길 교수가 돌아가셨다. 일제강점기 이후에 한국 역사의 큰 흐름을 다시 세우면서 역사학계의 한 획을 그었던 분들이다. 사회적으로도 큰 역할을 하셨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팔레 교수가 아쉬워했던 1990년대 이전과는 달리 이제 세계 유수의 대학에 한국학 프로그램이 설치됐다. 중국학과 일본학 뒤에 있었던 한국학은 이제 일본학보다 더 앞에 서 있다. 그러나 한국학의 수준은 한류의 수준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보편적 국제질서였던 조공제도
이제 다시 세계사 속에서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찾아야 한다. 특히 한국의 역사가 세계사의 일부로서 보편성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세계 지역학 속에서 한국학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다. 물론 이는 단지 당위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조공외교만 해도 그렇다.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조공외교가 동아시아에만 있었던 특수한 국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19세기 말 유길준이 지적했듯이 조공외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에도 존재했다. 불가리아를 비롯한 일부 국가들은 오스만투르크와 조공제도를 통해 생존하고 있었다.
냉전시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1세계의 국제질서 역시 조공제도와 유사했다. 미국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세계 경제질서에 편입을 약속하면서 미국의 군사력에 의해 안보를 지탱했던 제1세계 국가들은 19세기 이전의 조공국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근 영국의 한 학자는 오히려 냉전 시기의 국제질서가 조공외교를 가장 잘 구현했던 제도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식민지의 다양한 유형 이해해야
식민지 시기에 대해 타이완이나 영연방국가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왜 한국만 부정적으로 평가하느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식민지가 되기 이전 단 한 번도 독립국가였던 적이 없었던 타이완, 중앙집권적인 단일왕조를 형성하지 못했던 일부 영연방국가와 한국을 비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주변국으로부터 시련을 당했던 폴란드나 핀란드, 그리고 아일랜드와 알제리에서 한국과 유사한 기억과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식민지 또는 점령지였다고 해서 다 같은 조건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이라는 강대국 옆에서 수천년 동안 독립된 왕조를 유지했던 한국 역사를 보면 조공외교는 오히려 현명한 생존전략이었을 수 있다. 미국에 의존한 남한과 소련, 중국에 의존한 북한을 비교하면 결론은 더 명확해진다. 조공은 약소국의 현명한 생존전략으로 재해석이 가능하다. 19세기의 격동기에 세계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한국학 선구자들의 시대 인식
오히려 수천년 간 중앙집권적 독립왕조를 유지했음에도 식민지가 된 상황이 더 신기할 따름이다. 역사적으로 그런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조공외교도, 식민지적 경험도 한국의 특수성이라기보다는 세계사에서 보편적 현상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더 이해하기 쉽고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한영우 교수, 강만길 교수, 그리고 팔레 교수는 모두 한국역사와 한국학의 선구자들이셨다. 이들의 학문에는 그 시대의 고민이 녹아 있었다. 이제 후학들이 답할 차례이다. 2000년대 이후 변화하고 있는 세계와 한국. 그 무대 위에서 우리는 어떤 한국학, 어떤 한국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칠 것인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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