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마지막 기회다” 일본의 반도체 절치부심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있나. 무언가에 도전했다가 재도전했던 기억은. 지금 일본은 한번 겪었던 실패를 곱씹고 또 곱씹는 중이다. 그 실패는 다름 아닌 반도체. 잃어버린 일본의 30년은 단순히 저성장의 긴 터널만은 아니었다. 한때 세계 시장을 이끌었던 일본의 반도체 역시 몰락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던 암흑기이기도 했다.
먼저 했던 실패 하나. 지난 2000년 3월 일본 히타치는 대만 회사와 함께 트레센티테크놀로지스를 세웠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산업을 위한 도전장이었다. 당시 이사를 지낸 인물이 올해 71세인 고이케 아쓰요시(小池淳義). 라틴어로 300을 뜻하는 단어에서 차용해 회사 이름을 ‘트레센티’로 지은 사람이 그다. 반도체 원판에 해당하는 직경 300㎜의 웨이퍼를 상징하도록 이름을 만든 것이다. 정부의 전폭 지원을 받으며 일본 회사 11곳이 뭉쳐 반도체를 설계하고 제조한다는 꿈을 키웠지만 트레센티는 실패했다.
그리고 지금. 고이케는 지난해 설립한 라피더스 사장으로 다시 등장했다. AI(인공지능) 시대를 겨냥해 소니와 도요타 등 일본 대표기업 8곳이 지난해 뭉쳐 세운 반도체 회사 말이다. 재밌는 건 라티어로 ‘빠르다’는 의미의 라피더스란 회사 이름을 지은 것도 바로 고이케다. 트레센티와 닮은꼴인 라피더스. 일본 경제산업성이 약 3조원을 투입하는 사실상 ‘국책 파운더리 회사’인 라피더스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최근 『반도체 입국 일본의 역습』을 내놓은 구보타 류노스케는 이렇게 지적했다. “경제산업성이 주도한 과거 반도체 전략 실패 원인을 찾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황금기를 되찾자는 바람이 통했던 걸까. 공교롭게도 같은 달 일본 경제산업성이 내놓은 반도체 디지털 산업전략 보고서에선 비장함이 묻어났다. 무려 200쪽이 넘는 보고서, 그 앞머리에 등장한 단어들은 이랬다. ‘국가 존망이 걸린 문제. 최후의 기회. 이런 흐름에서 살아남는 것은 사활의 문제.’ 마치 이를 악다물고 쓴 것처럼, 이번엔 정말 성공하고 말겠다는 결기마저 느껴진다. 이런 일본을 바라보는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달라진 일본의 태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과거 실패를 철저히 반성하고 진심으로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주 반도체 핵심 소재 회사이자 세계 1위 회사(JSR)를 정부계 펀드를 통해 사들였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에 이어 3일 유럽연합(EU)과도 반도체 연계 강화를 위한 양해각서(MOU)도 맺었다. 이구동성 “마지막 기회”라며 전력투구 중인 일본을 보며 “우리 정부는 뭘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건 노파심 때문일까.
김현예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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