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에서 가장 핫한 도시는? '현시점 세계관 최강자'인 서울!
지난해에는 디올이 이화여대에서 2022 프리폴 패션쇼를 열었다.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이화여대 ‘과잠’을 입고 피날레 무대에 올랐고, 디올과 이화여대의 파트너십 체결까지 이뤄졌다. 파리 몽테뉴가의 부티크를 성수동에 옮겨온 디올 성수는 지금까지도 일대에서 가장 붐비는 포토 스폿. 아미는 광화문광장 육조마당에서 2023 S/S 패션쇼를 연 데 이어 가로수길에 전 세계 최대 규모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했다.
올해는 더 본격적이다. 2019년 인천국제공항 격납고에서 스핀오프 크루즈 쇼를 선보였던 루이 비통이 한강 잠수교에 하우스 최초의 프리폴 시즌 패션쇼를 펼쳤다. 구찌는 아시아 최초로 크루즈 쇼를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행했다. 이번 패션쇼를 위해 구찌가 오래 공들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11월로 예정됐던 구찌 코스모고니 컬렉션 쇼가 이태원 참사로 취소되자, 이를 다시 성사시키기 위해 향후 3년간 경복궁 보존 관리 및 활용 활동을 후원한다는 업무 협약도 맺었을 정도니까. 루이 비통의 잠수교 쇼 역시 한국관광공사와의 MOU를 통해 진행된 것으로, 패션쇼뿐 아니라 포토그래퍼 사라 반 라이가 포착한 〈루이비통 패션 아이〉 ‘서울’ 편 출간 및 전시까지 열었다. 이 책에는 느긋한 종로 풍경부터 번쩍이는 네온사인까지 다채로운 서울의 모습이 담겼다. 산울림의 ‘아니 벌써’가 울려 퍼지는 잠수교 모습이 루이 비통을 통해 생중계되고, 경복궁 근정전에 전 세계 프레스와 셀렙이 모여 구찌 쇼를 감상하는 사건이 불과 한 달 안에 일어난 일이라니! 스멀스멀 차오르는 ‘국뽕’마저 느껴진다.
이런 ‘서울 러시’는 왜 일어난 걸까? 여러 글로벌 브랜드가 서울을 찾으며 언급했던 이유로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 ‘역동적인 헤리티지와 문화, 창의성’,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 등이 있다. 서울이라는 붐비고 바쁜 도시, 그 안에 보존된 전통문화가 이루는 다이내믹한 풍경과 에너지에 흥미를 느꼈다는 것. 2015년 칼 라거펠트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선보였던 샤넬의 2016 서울 크루즈 컬렉션을 기억하나? “사람들은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한국은 많이 모르는 것 같다. 그 점이 좋은 아이디어가 됐다”라고 밝혔던 그는 모델들에게 가체를 씌우고, 디자인에 색동 컬러와 조각보 디테일을 활용했다. ‘서울 러시’를 누구보다 일찍 예견했을지언정 당시 컬렉션은 동시대 여자들의 구미는 당기지 못했다. 그에 비해 올해 열린 행사들은 ‘현재의 서울’을 전통과 함께 아우르고자 했고, 이 도시를 이루는 사람들과 에너지에 대한 관심으로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접근이 돋보였다.
세계 각국에서 게스트를 불러 모으는 패션쇼, 으리으리한 플래그십 스토어…. 천문학적 비용과 인력이 드는 행사를 낯선 도시인 서울에서 열게 한 계기는 뭐였을까? 무엇보다 K팝 스타, K-콘텐츠의 흥행 파워가 유효했다. BTS와 블랙핑크가 빌보드 차트에 오르고 코첼라 헤드라이너로 나서는 사건들이 대중음악계를 넘어 패션, 문화계로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2018년경 시작된 K팝 붐은 2019년 영화 〈기생충〉, 2021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영화 〈미나리〉 같은 K-콘텐츠의 전 세계적 흥행으로 이어졌다. 특히 2019년 11월 발생한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강제 집콕’하던 시기,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넷플릭스를 통해 색다른 에너지를 지닌 한국 콘텐츠들이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가며 영향력을 키웠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엑스오, 키티〉는 아예 배경을 서울로 했을 정도!
현재 패션 브랜드의 앰배서더로 활동하는 인물들을 보라. K-드라마 배우들이 당대 핫한 걸 그룹, 보이 그룹 멤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루이 비통의 정호연과 BTS 제이홉, 송중기, 뉴진스 혜인, 샤넬의 지드래곤과 블랙핑크 제니, 김고은, 디올의 블랙핑크 지수와 김연아, BTS 지민, 차은우, 셀린느의 블랙핑크 리사와 박보검, BTS 뷔, 프라다의 NCT 재현과 엔하이픈, 미우미우의 이유미와 윤아, 아이브 장원영, 구찌의 아이유와 뉴진스 하니, 이정재, 신민아, 엑소 카이, 펜디의 송혜교, 생 로랑의 블랙핑크 로제, 버버리의 손흥민과 전지현, 뉴진스 다니엘, 지방시의 태양… 수많은 한국인 앰배서더가 매 시즌 컬렉션 참석은 물론이고 글로벌 캠페인에도 등장한다.
루이 비통은 잠수교 쇼를 앞두고 정호연이 사랑하는 서울 스폿을 별도의 영상으로 소개하고, 듀오 포토그래퍼 이네즈와 비누드가 촬영한 제니의 샤넬 22백 캠페인에는 한옥 풍경이 담겼다. 이들이 사는 도시인 서울을 찾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늘었다. 최근 행사에 초대된 해외 에디터와 스태프들은 일정 전후로 서울 곳곳을 돌아보기도 했다. 누메로 베를린 패션 디렉터는 MMCA와 리움 등 미술관, 분더샵과 콤포트 같은 플레이스, 남대문시장까지 찾아 다이내믹한 풍경을 즐겼다고.
또 하나, 한국 시장의 구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인의 명품 사랑은 새삼스러울 지경이지만, 코로나19에 대한 보복 소비로 더욱 불이 붙었다. 모건스탠리가 발표한 명품 소비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의 1인당 명품 구매액은 미국과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를 기록했다. 2022년 기준 한국 명품 시장은 약 21조원 규모로 전년 대비 24%나 성장했다. 같은 해 루이 비통의 한국 매출은 1조6923억원, 샤넬은 1조5900억원, 디올은 9305억원이었다. 구찌는 전 세계 매출의 9%를 한국이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난해 한국 매출 역시 1조원을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팬데믹 이후 거듭 가격을 인상했음에도 한국인의 구매열은 식지 않았다. 한국이라는 작은 국가가 이런 기록을 안겨주니, 구매력 짱짱한 고객을 찾아오는 브랜드들의 행렬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오늘날 영광의 불씨가 된 셀렙 파워가 사라지면, 서울에 대한 열정도 사그라들까? 만일 이들이 활동하지 않는 순간이 오더라도 서울에 대한 관심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번 ‘서울 러시’를 계기로 더 많은 세계 자본이 한국을 주목할 것이다. 한국 콘텐츠의 잠재력에 주목한 넷플릭스라는 공룡이 제작에 투자해 K-콘텐츠 파워를 ‘월클’로 키워내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장으로 확장되는 장면을 생생히 목격했으니까. 2018년 스타일난다를 인수했던 로레알 그룹은 최근에도 국내 스타트업 기업에 관심을 보이며 투자하고 있다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은 이미 다수 포착됐다. 아더에러와 자라, 젠틀몬스터와 메종 마르지엘라 같은 협업도 좋은 예시다. 무신사는 지난 4월 도쿄 시부야에 10일간 팝업 스토어를 열고 2000아카이브스, 아모멘토, 써저리 등 국내 브랜드로 일본 시장을 공략했다. 구매력 좋은 영 제너레이션이 사랑하는 브랜드들도 스스로 힘을 키우는 중. 떠그클럽, 앤더슨벨, 더오픈프로덕트, 마뗑킴 같은 국내 신진 브랜드는 콧대 높던 백화점들이 팝업 스토어, 매장 입점 러브콜을 보낼 만큼 인기가 뜨겁다. 전 세계 트렌드의 시차가 0에 수렴하는 요즘, 크고 작은 한국의 브랜드와 아티스트가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적기다. 미국이어서 빠르고 한국이라서 느릴 것도 없는, ‘계급장 떼고’ 한판 붙을 수 있는 시대랄까.
최근 구찌 쇼를 취재한 한 해외 매거진에서는 경복궁의 역사를 소개하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파손됐다가 복원을 거쳤다”는 점을 언급했다. 불과 20세기까지도 전쟁 피해를 겪은 도시가 이토록 빠르게 급성장을 이뤘다는 점이 흥미로웠던 모양. 이런 성장의 역사 역시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로 대변되는 한국인의 근성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닐지. 서울 웨이브는 이제 시작이다. 더 큰 세계로 물꼬가 트인 지금 어떤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 민주킴이 〈넥스트 인 패션〉에서 우승해 세계의 주목을 받고, 미스 소희의 졸업 작품 드레스가 할리우드 셀렙들의 사랑을 받더니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 기증되고, 루이 비통 익스클루시브로 파리 패션 위크에 데뷔한 정호연이 세계가 주목하는 배우와 루이 비통의 뮤즈가 돼 서울에 ‘금의환향’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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