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과 여순, 비극과 서정을 한데 버무린 시집

정병진 2023. 7. 3.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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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순 시인 여섯 번째 시집 '국화는 뜨겁다' 출간

[정병진 기자]

목회자이자 시인인 정홍순 시인은 남도의 서정을 주로 노래하는 시인이다. 전남 순천만 갯벌을 노래한 연작 '갯벌 풍류'만도 20편을 썼다. 그는 "순천에 20년 넘게 살았으면서도 왜 '순천만'을 읊지 않느냐"는 한 아우의 타박을 마치 계시처럼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 뒤부터 자전거 타고 순천만을 구석구석 누비며 숙성시켜 걸러낸 시들이 '갯벌 풍류' 연작이다.

정 시인이 최근 펴낸 시집 <국화는 뜨겁다>도 점차 잊혀가는 남도의 풍류 서정이 주조음을 이룬다. 이번 시집은 '게고둥이' 사는 모습을 '생의 순례'로 읽어낸 시로 시작해 "한 뼘 한 뼘" 몸을 움츠렸다 폈다 하며 가는 '자벌레'라는 시로 끝맺는다. 그는 누구도 잘 눈여겨보지 않는 미물, 밤송이, 손수건, 비둘기호, 서산 어리굴젓, 애기똥풀 따위를 소재로 고단한 삶의 여정을 그려낸다.
 
▲ 시집 <국화는 뜨겁다> 정홍순 시인의 시집 <국화는 뜨겁다>
ⓒ 정병진
  
'풍류'와 '서정'에 꽂힌 시인에게서 역사의 아픔과 시대 정신을 찾기란 얼핏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아름다운 서정에 날선 민중의 저항을 구하기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처럼 잘 어울리지 않는 일 같기 때문이다. 헌데 정홍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자신의 장기인 서정과 풍류 속에, 제주 4.3사건과 여순민중항쟁을 무리 없이 잘 녹여 담아냈다.

"말 잔등에서 한 쌍의 봄이 까르르/터지고 있는 제주/육탈한 삼나무 하얗게 겨울을 보내고 섰다/표선 모래밭 헤치면 묻어둔 조각/서너 개는 거둘 수 있겠지...(중략)....탐라 시민들 가운데/사내들 족집게로 집어내듯/귀신들 날뛰었으니/영등할미 자리젓 냄새 넘쳐나는/무남촌(無男村)/삼나무 뼈다귀에/구멍 난 돌 몇 개 걸어두고 온다" ('제주 삼나무' 시 부분)

위 내용은 제주 표선면 해수욕장에서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을 떠올린 시이다. 토벌에 나선 군경과 서북청년단은 남자들을 쏙쏙 골라 '자리젓'처럼 만들었고 마을은 남자 없는 '무남촌'이 되고 말았다. 제주 표선 모래밭의 아름다운 풍경과 아낙네들의 풍경 감상에 넋을 잃은 사람들은, 시인에 보기에는 "귀신들 날뛰고," "영등할미 자리젓 냄새 넘쳐나는" 그 지옥 같은 흔적의 조각은 놓친 거다.

이런 시인의 시선은 세계 최장 동굴로 알려진 제주 '빌레못굴'을 노래한 시에서도 이어진다.

"깨작깨작 울어대는 까치야 너 아니다/반가운 듯/영혼 없는 울음에 어찌 속을까/취항 기념으로 불러들인 너로/관광이나 하려고 오지 않았다....(중략)...백두산 아래/세경할미 자청비가 밀어 올린 농지/인적 드문 담길 헤치고 들어와/ 삼십 리 땅속 바람 앞에/ 나는 섰다/흑-흑/뜨거운 입김이 흘러나온다/오소리 작전으로 몰살당한 스물아홉/어음리 사람들....(하략)"
('빌레못굴 바람' 부분)

동굴에서 나오는 더운 바람, 시인에게는 

그 기나긴 동굴에서 뿜어 내오는 더운 바람을 시인은 '흑-흑' 흐느끼는 소리로 듣는다. "오소리 작전으로 몰살당한 스물아홉/어음리 사람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과연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4.3 당시 그들의 처참한 학살을 기억한다면, 세계 최장 용암동굴인 '빌레못굴'에 가서 그저 '세계 최대' 동굴 경관만 보고 경탄할 일은 아니다. 그건 영혼 없이 "깨작깨작 울어대는 까치"와 같이 슬프고 허탈한 일이다.

제주 4.3과 여순은 쌍둥이처럼 잇달아 터졌다. 제주 출병을 명령받은 여수 14연대가 "동포 학살을 거부한다"며 봉기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이 바로 여순민중항쟁이다. 당시 봉기한 14연대 군인들은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시인은 시린 겨울을 다 보내고 마침내 봄을 맞아 논바닥에 나가 '객토' 작업을 하는 '늙은 농부'를 그려낸다. 언뜻 옛날 농부가 지게로 일할 무렵의 정겨운 시골 풍경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 시는 "추락한 논바닥에서/아침이 왼쪽 어깨로 오고 있다"는 첫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추락한 논바닥에서/아침이 왼쪽 어깨로 오고 있다/황토 한 짐 부어놓고/햇살 지고 나오는/늙은 농부의 밭에서 시작한 치토(埴土)/추위가 풀리기 시작하였다...(중략)....문수골 땅굴에서 흐느끼고 있는/빨치산의 눈물이/고드름 끝으로 떨어지는 날이면/서걱서걱 얼음 뜬 섬진강/해설피 건너오는 형님아/소리내 불러보지도 못했다/바람이 떴다/삽날도 부러질 땅이 녹고 있다/황토 한 삽 떠서 재 너머 다랑논에/한 짐 한 짐 놓는다/형님아/옛집 잊어버리지 말고/아무 때든 잘 밟고 찾아오기나 해라" ('객토' 부분)

동족상잔과 민족분단만큼은 막겠다며 봉기한 군인들은 당시 '빨갱이'로 몰려 숱한 희생자를 내고 절멸하다시피 하였다. 그렇게 누구의 형님들은 토벌대의 대대적인 진압 작전으로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무수히 스러졌다.
 
 2021년 6월29일 당시 여순사건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전남 여수시청 대회의실에서 유족들이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여순사건 특별법이 2021년 제정됐음에도 제14연대 소속 군인 유족들은 지금껏 '우리도 피해자'라는 목소리조차 밖으로 내기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그런데도 시인은 "삽날도 부러질 땅이 녹고 있다"면서 이념과 냉전의 찬 겨울이 끝나 고드름이 다 녹아 황토로 '객토'할 날이 거의 이르렀음을 내다 본다.

'칠불사 아자방'이라는 시는 75년이 흘렀건만 여순항쟁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회복이 더딘지를 잘 보여준다.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때 담공선사가 지리산 칠불사에 지은 亞자 모양의 온돌방 명칭이다. 이 아자방은 여순민중항쟁 당시 불탔다가 1983년에야 복원되었다.

그런데 시인은 아자방 복원이 원형이 아니라 엉뚱하게 변형됐음을 아쉬워한다. 본디 아자방은 구들이 亞자 형태이고 방 자체는 네모난 모습이었는데도, 복원을 구실로 방을 亞자로 만들어 놓았다는 거다. 이로써 시인은 여순항쟁의 생채기가 사람은 물론 고유의 문화재에까지 남아있음을 안타까워한다. 시인의 말이다.

"불 한번 지펴 덮이면/한 달 동안이나 불기운 유지하는 구들 아자방(亞字房)/...(중략)...담공선사의 공간적인 것도 해석 못하고/방 모양새가 아자라 우기고 있는 한심한 일에/무운(無紜)은 소리 지르고 있다/아자고래 복원해야/진짜 아자방 복원하는 것이라 말이다/불 깔고 앉아 참선하던 칠불사/여순민중항쟁 토벌작전 때 소실된/연못에 뜬 연꽃이/어떻게 피었다 지는지 보았을까...(하략)..." ('칠불사 아자방'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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