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운석처럼 사라진 김옥균

김삼웅 2023. 7. 3.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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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 2] 그는 개혁의 선각자인가, 아니면 조급한 야망가인가

[김삼웅 기자]

 김옥균.
ⓒ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김옥균은 우리나라 근세의 여명기에 조국의 자주독립과 사회적 진보를 위하여 투쟁한 탁월한 애국적 정치활동가이며 사상가였다. 그는 낙후하고 부패한 봉건제도를 반대하며 외래 자본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 자기의 전 생애를 바친 고결한 애국자였다. 그에 의하여 지도된 갑신정변은 우리나라에서의 첫 부르주아개혁 시도로서 조선근세 역사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한다. (주석 2)

갑신정변은 조선의 패망을 앞당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점에서 김옥균은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혁명과 같은 국가적 사건은 아무리 동기가 좋을지라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결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갑신정변은 여건이 무르익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추진된 까닭에 애초부터 이미 실패가 예견된 정변이었다. 김옥균이 근거없는 자긍심으로 혈기와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무리한 정변을 시도함으로써 일제의 조선침략을 방조한 잘못만큼은 엄중히 추궁할 필요가 있다. (주석 3)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진영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긍정과 부정 그리고 호오(好惡)가 크게 갈린다. 선각자·풍운아·사상가·혁명가, 근대화의 기수, 이단아, 친일파, 반역자 등 다양하고 상반된 평가가 따르고, 박제된 낡은 사고에 대항하여 신사고, 새물결 새바람을 일으킨 개화사상가, 호방하고 친화력이 있는 근세의 지도자, 자기확신이 강하고 조급성이 심하여 리더십이 부족한 인물 등으로 평가가 갈린다.

그는 개혁의 선각자인가, 아니면 조급한 야망가인가. 

김옥균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상반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선정부에 대한 반역, 일본세력에 의지, 망명 후 일본에서 박해와 문란한 사생활 등의 작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건 가치는 물론 국정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은 당시의 시대정신이고 이후 동학혁명 정신으로 이어졌으며 갑오개혁에서 부분적으로 시행되었다.

양반신분제도의 폐지, 문벌의 폐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국가재정의 개혁, 공장제도에 의거한 근대 공업의 건설, 광업의 개발, 선진 과학기술의 도입과 채용, 상업의 발달과 회사제도의 장려, 화폐의 개혁, 관세 자주권의 정립, 농업과 양잠의 발전, 목축의 발전, 임업의 개발, 어업의 개발과 포경업의 개발, 철도의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거한 통신의 발전, 인구조사의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나라의 자주근대화를 위해서 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신교육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며,  자주 국방력 양성, 경찰제도의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중립화 등을 주장하였다. (주석 4)

우리 근세사에서 대단한 식견과 조직력을 갖고 이만큼 다양한 아젠다의 국정개혁을 시도했던 인물은 김옥균을 제외하고 유례를 찾기 쉽지 않다. 일본이 영국과 같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조선을 동양의 프랑스와 같은 자주국이 되어야 한다고 봉기했다가 하필이면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출신 홍종우에 의해 암살된 것은 역사의 저주스러운 운명으로 돌려야 할까.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33세, 홍영식 30세, 박영효 24세, 서광범 23세의 약관들이었다. 이런 청년들이 <14개조 정강>을 내세우며 비록 '3일천하'에 그쳤지만 근대적 자주독립국가 수립에 나선 것은 조선 500년사에 최초 최후의 거사였다.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운석처럼 사라진 김옥균의 발자취와 못 이룬 꿈을 찾아 떠나는 이유다. 

뿜어뿜어 붉은 피 고랫살 같이 홱 뿜어
마른 이 강산 축이러 드시올 제
구만리 저 하늘 덮는 구름짱이 이런 듯 장하옵나니
동방의 별, 그만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앗네
바람에 날리는 산골 솔씨조차
십년이면 돌이 기둥 된다 하는데, 아하 선생만ㅡ(중략)

흘러흘러 피눈물 말(斗)로 흘러
동반도(東半島)의 이 백성아 참회의 눈물 크게 흘려 
가신 님 무덤가에 꽃이나 피어드리세
꽃 필 때 기(旗)도 날리리 배는 항구로 가리
바람은 차고 날은 저문데
가마귀조차 산 넘으니 선생은 누구 더불어 이 밤 지내나. (주석 5)

주석
2> <김옥균>,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편, 서문, 역사비평사, 1990.(이후 <역사연구소 편 김옥균> 표기)
3> 신동준, <때를 기다리지 못한 실패한 혁명가>, <개화파 열전>, 14쪽, 푸른역사, 2009.
4> 신용하,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한국근대의 선구자와 민족운동>, 29~30쪽, 집문당, 1994.
5> 김동환, <김옥균의 묘>, <동광> 193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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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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