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대통령 왜 ‘과학계 카르텔’ 질타했나…시발점은 ‘과기원 예산 이관’ 사태
대통령 지적 예상 못한 과기정통부는 ‘진땀’
R&D 예산 기획 체제 개편될 듯…출연연 구조조정 가능성도
지난 6월 28일 오후 대통령실 영빈관에서 열린 ‘2023 국가재정전략회의’. 2024년도 예산 편성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이날 회의의 분위기는 천당과 지옥을 오고갔다는 게 참석자들의 이야기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건전 재정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발표하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외국인 숙련기능인력 쿼터를 3만명 이상으로 늘린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윤 대통령이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연구개발(R&D) 재정투자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한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발표에 대해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R&D 국제협력은 세계적 수준의 공동 연구를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장에 참석한 이들이 전하는 발언 수위는 그보다 훨씬 셌다. 한 참석자는 “윤 대통령이 이 장관에게 국정 기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질타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결국 이날 회의가 끝난 뒤 과기정통부는 내년도 R&D 예산안에 대해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원래대로라면 예산 당국인 기획재정부에 6월 30일까지 제출해야 했지만, 처음으로 법정 기한을 넘겨서 재검토에 들어간 것이다.
과기정통부는 이날 회의가 열리기 전까지도 R&D 예산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질타를 예상하지 못 한 것으로 전해진다. 과기정통부는 6월 30일에 기획재정부에 R&D 예산안을 제출하고, 7월 초에는 R&D 예산안을 총괄하는 주영창 과학기술혁신본부장과 과기정통부 출입기자단의 오찬 간담회도 준비하고 있었다. 내년도 R&D 예산안에 대한 설명을 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예산안 자체가 원점 재검토에 들어가면서 오찬 간담회도 당연히 취소됐다. 한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1차관 교체까지 겹치면서 과기정통부는 혼돈 상태”라고 전했다.
지난 주말 사이 과기정통부와 R&D 예산 기획·조정 기관들은 윤 대통령이 지적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 예산’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과학계 카르텔을 깨라는 강도높은 발언까지 나오게 된 배경이 뭘까.
관가의 복수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번 사태의 시발점은 작년 11월로 거슬러 간다. 당시 기획재정부는 ‘고등·평생교육 특별회계’ 신설을 추진하면서 4대 과학기술원 예산을 과기정통부에서 교육부로 이관하려고 했다. 4대 과학기술원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광주과학기술원(G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으로 과학기술 분야 고급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교육부가 아닌 과기정통부가 예산 편성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기획재정부는 특별회계에 과학기술원이 포함되면 더 많은 재정 지원이 가능하다고 밝혔지만, 과학계는 교육부가 예산 편성 권한을 쥐면 과학기술원의 기초과학 연구 역량이 저해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과기정통부 역시 반대 입장을 내면서 결국 4대 과학기술원 예산을 교육부로 이관하는 방안을 없던 일이 됐다.
과학계와 예산당국 사이에 벌어진 힘겨루기처럼 보였지만, 이 일을 계기로 예산당국과 대통령실에선 과학계가 이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공고히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고 한다. 한 정부 관계자는 “전체 정부 예산에서 R&D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은데도 과학계는 다른 부처나 외부 전문기관을 배제하고 자신들끼리만 예산 편성을 좌지우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과기정통부가 정부 부처가 아니라 사실상 과학계의 편이 돼서 윤석열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게 확인됐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각 부처에 요구한 재정 다이어트에 과학계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것도 문제였다. 과학계에 따르면, 25개 과학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을 관리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는 내년도 출연연 예산안으로 올해보다 5% 증가한 2조3592억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출연연은 12대 국가전략기술과 관련된 연구를 이행하기 위해 예산 증액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예산 당국은 ‘재정 다이어트’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가운데 국가 R&D 예산의 부실한 관리 실태가 논란의 실마리가 됐다. 중소기업들이 국가 R&D 예산을 ‘눈먼 돈’으로 여기며 컨설팅 업체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된 연구 성과 없이 타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실질적인 영업 활동 없이 정부 R&D 지원금으로만 연명하는 좀비 기업이 2012~2018년 동안 882곳에 달했다. 보조금을 노리는 좀비기업을 타파하라고 여러 차례 윤 대통령이 지시했지만, 과기정통부가 미적거렸다는 게 대통령실의 평가다.
윤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조성경 대통령실 과학기술비서관이 이번 차관 인사로 과기정통부 제1차관에 전진 배치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조 신임 차관은 그동안 과기정통부가 제대로 나서지 않았던 R&D 예산 관련 제도 개편에 본격적으로 나설 전망이다.
출연연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도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출연연은 기업이나 민간이 하기 힘든 도전적인 연구에 나설 수 있게 정부 R&D 예산 지원을 받는 연구기관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업성이 없고 기술이전도 어려운 겉포장만 그럴싸한 기술에만 집중하는 곳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한 정부 관계자는 “출연연이 민간 연구기관과 적극적으로 경쟁하고 실제 기업이나 산업에 도움이 안 되는 기술 개발에서는 손을 떼야 한다”고 말했다.
출연연 출신의 한 대학 교수도 “출연연 소속 연구자들이 기업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임팩트 팩터(IF)가 높은 논문을 쓰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며 “정부 R&D 예산이 들어가는 프로젝트로 자신들의 급여를 받으면서 사회에 기여할 연구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높일 연구만 하는 문화가 팽배해 있다”고 비판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윤 대통령은 R&D 재정투자에 대해 전면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국제협력’ 분야를 콕 짚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해외 순방 때마다 해외 과학자들을 만나고 과학기술 분야의 국제협력과 교류를 늘리라는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과기정통부의 R&D 예산안에 국제협력에 대한 의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는 게 대통령실의 반응이다.
한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국제협력 예산을 5000억원에서 7000억원까지 늘렸지만, 대통령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것 같다”며 “전면 재검토를 통해 어떤 사업을 늘릴 수 있을지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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