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길마다 아픈 무릎, 그래도 자전거 고집하는 이유

박희종 2023. 7. 3.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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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근육도 아직 쓸만... 자전거 타고 골짜기를 누비는 기쁨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박희종 기자]

얼마 전 친구와 자전거를 타던 중이었다. 친구가 말하기를, "이제 힘이 드는데 전기자전거로 바꿔볼까?" 한다. 자전거를 구입해 10년 가까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친구와도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자전거를 타고 가끔은 먼 길 나들이도 하는데, 이걸 전기자전거로 바꿔보자는 제안이다. 조금 더 버텨보자는 말로 마무리를 했지만 가슴 한 켠이 뜨끔했던 건 왜일까? 가끔 자전거로 언덕을 오를 때 무릎이 아프고 숨이 차기도 해서다.

새벽 창문을 열자 앞산에 안개가 자욱하니 한낮에는 더울 기세다. 주섬주섬 자전거 복장으로 갈아입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물 한 병에 빵 한 조각, 텃밭에서 싱싱한 오이 한 개를 따 배낭에 넣었다. 전기자전거로 바꾸어야 하나를 되뇌며 시골동네를 돌아볼 생각이다. 자전거를 타는 코스는 대략 서너 군데가 있는데 계절 따라 아름다움을 안겨주는 신나는 코스다. 

대략 30~50km 정도인데, 제일 짧은 코스는 시골길을 지나 산을 통해 산성으로 이르는 길이다. 다른 코스는 느슨한 언덕이 2km 정도 이어지면서, 긴 언덕에 아름다운 호수가 나타나지만 가장 고단한 코스다. 오늘은 중간정도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긴 언덕이 2km 정도 이어지면서 갑자기 급한 경사가 나타난다. 급한 경사를 1km 정도 타고 넘으면 긴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조금은 편안한 도로다. 

골짜기엔 농부들의 손길이 가득 

안개가 자욱한 시골동네를 얼른 벗어나야 한다. 농사일에 나서는 이웃들을 만나면 민망해서다. 페달을 밟고 내려가는 풍경은 대관령을 방불케 한다. 언덕을 내려가는 맞은편 산자락엔 뿌연 안개가 가득하고, 길 옆으로는 검푸른 배추와 양배추로 가득한 비탈밭이 있다.

시골에 사는 맛이 이런 것이려니 하면서도 농부들의 고단한 발길을 생각해 본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논둑길을 오가고, 장마 끝에 고추밭을 소독하는 농부도 있다.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언덕을 오른다.
 
▲ 아침 안개가 자욱한 골짜기 아침 안개가 가득한 골짜기의 모습이다. 논에는 검푸른 벼가 가득하고 곳곳엔 밭작물들이 가득한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 박희종
 
지난해에 님을 기다리는 듯 화려했던 능소화 덩굴이 작아졌다. 커다란 나무를 가득 안고 있던 능소화가 몇 송이 꽃이 있을 뿐이다. 능소화를 뒤로하고 달려가는 논길에는 농부들의 노고 덕에 허전하던 논들이 가득해졌고, 곳곳에 옥수수가 개꼬리를 밀어내고 있다. 산뜻하게 단장된 시골집 앞에는 가지런히 자란 고추가 가득하다. 

어머님 떠오르는 고추밭길

오래 전의 어머님이 생각나는 옥수수와 고추밭이다. 겨울부터 봄을 지나 여름까지, 어머니 땀으로 만들어진 붉은 고추는 과거 우리 집안의 큰 보물이었다. 자식들 등록금을 위해 팔아야 했고, 가용할 돈을 위해 또 팔아야 했다. 어머님의 피땀이 가득했던 그 고추밭의 풍경이 자전거길 곳곳에서 눈에 띈다. 곳곳에 보이는 옥수수도 과거 여름밤을 든든하게 해주는 간식이었는데 이젠 시골의 중요 소득작물이 되었다. 그렇게 풍경을 구경하며 근육의 고단함이 필요한 긴 언덕 앞 모퉁이를 돌았다. 

지난해에도 만났던 노란 기린초가 꽃을 피웠다. 노랗게 피어 난 기린초가 가득한 언덕엔 누런 밤꽃이 피어 나풀대고 있다. 골짜기의 모습이 한없이 아름답다. 개망초가 하얗게 꽃을 피웠고, 우뚝 선 망초대가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긴 언덕을 내려가는데 느닷없이 태양광 패널들이 나타났다.

생각해보니, 지난해까지만 해도 누런 벼가 가득하던 논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태양광 패널이 벼를 심던 논에도 들어서 있는데 푸름을 과시하던 산골짜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한 번 설치해 놓으면 전기가 생산된다고 하니 그럼 이제 돈을 버는 일만 남은 것일까? 설치하는 것과 아닌 것 중 어느 게 더 좋을지 모르겠다고, 잠시 멈춰서서 생각하다가는 다시 얼른 페달을 밟는다. 
 
▲ 삶의 이야기가 가득한 골짜기 텃밭에 고추와 옥수수 가득하고, 뒤로는 안개가 자욱한 시골이다. 아직도 여름뻐꾸기는 울어대고 부지런한 농부의 발걸음이 바쁜 새벽이다.
ⓒ 박희종
 
커다란 도랑에 물이 가득하다. 지난밤에 내린 장맛비 덕에 풍성해진 도랑이다. 곳곳에서 우렁찬 소리로 흘러내리는 시냇물 소리가 시원하다. 긴 도랑을 지나 널따란 시냇물이 되어선 평온한 모습이다. 잔잔한 물가에 오리 가족이 나들이를 나왔고, 마침 떠 오른 햇살이 들녘에 가득이다. 농부의 손길을 제방의 작은 터도 남겨두질 않았다. 곳곳에 참깨가 심어져 있고, 장마가 끝나고 심은 들깨가 땅힘을 얻어가고 있다. 

고단함의 맛... 천하제일 자연밥상

한참 지속되는 고단함은 급기야 다시금 전기자전거를 생각나게 한다. 조금 쉬었으면 하지만 아직은 더 가야 한다. 얼마 전에도 거뜬하게 오고 간 자전거길을 쉬면서 갈 수는 없어서다. 조금만 더 버티면 편안한 길이 나온다.

'조금만 더'를 속으로 외치며 남은 근육의 힘을 믿어 본다. 오기를 품고 넘어선 자전거길에 기어이 드넓은 들판이 나타났다. 한쪽으로는 시냇물이 흘러가고, 제방 너머에 펼쳐지는 논자락이 편안하다. 봄철에 하얀 꽃이 피어 환상적인 벚꽃 터널을 만들어 주던 곳이다. 한참을 달려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녹음에 미쳐 달려가는 자전거길은 아직 근육의 힘이 남아 있다  

멀리 보이는 농막에 아침상을 차리기로 마음 먹었다. 길 옆에는 트럭이 세워져 있고 젊은 부부가 일을 한다. 논둑을 오가며 풀을 뽑고 검푸르게 자란 벼를 보며 흐뭇해하는 듯한 모습이다. 일이 끝났는지 트럭을 타고 동네로 향하는 부부가, 내 오래 전 기억의 농촌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경운기를 타고 가던 모습, 지게를 지고 가던 모습은 이제 어디서도 볼 수 없으니 말이다. 기어이 농막에 도착해 아침상을 차렸다.

시원한 바람을 밥상 삼아 텃밭에서 따온 오이를 꺼냈다. 여기에 시원한 물이 있고, 고소한 빵이 한 조각 있다. 마침 찾아온 밝은 햇살이 있으니 이것보다 좋은 아침상이 어디 있을까? 넓은 들녘에 일하는 농부가 있고 곳곳엔 하얀 백로가 먹거리를 찾고 있다. 농부는 농부대로 일을 하고, 백로는 나름대로 먹거리를 찾는다. 초록 속에 보이는 하양, 평화로운 들판에 나도 넋을 놓고는 바라 본다.

아침을 먹는지 아니면 자연을 먹는지 알 수 없는 상쾌한 아침이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지금까지 30여 km를 달려왔으니 근육이 골을 부린다. 평탄한 길이 아닌 언덕을 오르내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 녹음이 가득한 냇가 장맛비가 그치고 물이 넘치는 냇가 모습이다. 자연이 주는 초록이 주는 평안함에 여름은 점점 깊어가는 골짜기다.
ⓒ 박희종
 
집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맛있는 아침 공기를 만끽한다. 시냇물이 가득 흘러가는 냇가는 흙탕물로 변했다. 언제나 다슬기와 민물조개를 잡던 아낙들이 보이지 않는다. 장맛비가 많이 내렸음을 보여주는 냇물이다. 마지막 힘을 내며 페달을 밟아 본다. 남은 언덕을 올라가면 거의 50여km를 주파할 것이다. 

지나는 곳곳엔 설악초가 피어 있고, 분홍 달맞이꽃이 화답을 한다. 멀리엔 한 밭 가득한 옥수수가 개꼬리를 흔들고, 화려한 능소화꽃이 담을 덮었다. 지나는 차량들이 갑자기 많아졌다. 수도 없이 지나는 자동차를 피해 가며 달려가는 자전거길, 먼 산엔 안개가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안개가 벗겨진 산말랭이('산마루'의 방언)엔 분홍과 하양이 적당히 섞인 자귀나무가 꽃을 피웠다. 여름이면 능소화와 함께 골짜기를 수놓는 고고한 아름다움이다. 서서히 페달을 밟으며 오르는 동네입구에서 초록으로 무장한 평화를 다시 만났다. 자전거길에 만난 골짜기의 삶은 평안함을 주고, 허덕이던 근육은 아직 여전히 쓸만하니 그 사실이 새삼 다행인 아침이다.  

자연이 주는 평안함이 나를 언제나 자전거길로 불러내곤 한다. 이곳저곳을 누비며 만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오늘도 피곤한 줄 모른다. 고단하지만 아직 쓸만한 근육을 유지하는, 은퇴 후의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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