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배우발견㊿] 어쩌다 마주친, 그대…홍나현
‘배우발견’ 코너를 마감할 때가 왔다. 마지막 주인공을 누구로 할까 고심이 길었다. ‘올드무비’ 코너를 마칠 때도 한참을 고민하다 영화 ‘길’(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주연 안소니 퀸·줄리에타 마시나, 1954)를 택했는데, 그때보다 더 힘들었다.
우선 조연으로 만난 배우로 하고 싶었다. 주연을 맡은 배우들은 칭찬할 이들이 너무 많다. 어떤 면에선 불리하기도 하다. 잘하면 본전이라고, 웬만큼 눈에 띄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소름 돋게 잘해야 “역시!”라는 탄성이 나온다. 사실, 특별히 필자가 발견하지 않아도 이미 대중이 다 알아보셨기에 주연의 책임을 지고 있기도 하다.
최근 본 영화나 드라마에 조연으로 등장한 배우들 중에도 소개하고 싶은 이가 참 많다. 당장 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 하나만 봐도 소녀 이순애 역의 서지혜, 소년 백희섭 역의 이원정, 유범룡 역의 주연우, 고미숙 역의 지혜원, 봉봉다방 사장 이청아 역의 정신혜 등 청춘 배우들이 눈길을 끌었고 윤병규 이사장 역의 김종수, 순애 아버지 이형만 역의 박수영, 백동식 형사 역의 최영우 등 베테랑 배우들도 작품을 안정감 있게 받쳤다.
‘쌍천만 영화’에 등극한 ‘범죄도시 3’에는 온몸에 명품과 문신을 바르고도 겁 많고 소심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조폭 출신 정보원 ‘초롱이’ 역의 고규필이 신스틸러로 1000만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드라마 ‘이로운 사기’에도 해커 정다정 역의 이연, 링고 역의 홍승범이 특별한 재능이 인생을 힘들게 하는 ‘트리거’(방아쇠, 발단)로 작용한 인물의 복잡다단한 상처를 자기만의 에너지로 표현했고. 검사 류재혁 역의 최영준과 기자 우영기 역의 윤병희는 귀를 당기는 음색과 밀고 당기는 맛이 있는 특유의 발성으로 등장을 기다리게 하는 힘을 다시금 확인시켰다. 변호사 박규 역의 이창훈은 오묘한 끌어당김의 힘으로 더 알고 싶게 하는 매력이 있다. 김동욱이라는 스타배우가 형이라 부르고, 김동욱이 연기하는 주인공 한무영에게 아버지 부재를 채워 주는 키다리아저씨 같은 역할을 대중에게 각인되지 않은 배우가 해낸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해내고 있다.
드라마 ‘사냥개들’에도 좋은 배우가 많은데, 정말이지 모든 조연이 탄탄하게 제 몫을 해냈다. 그 가운데 현직 일식집 사장, 전직 ‘전설의 칼잡이’ 황양중 역의 이해영이 중년 배우의 내공을 유감없이 발산했다. 심지어 특별출연들마저 잘했다. 최시원은 이제 보이그룹 멤버보다 배우인 게 더 잘 어울릴 만큼 재벌 3세 홍민범을 맡아 호연을 과시했는데, 그의 곁에 형사 민강용 역의 최영준이 있어 더욱 빛났다. 사채업자 문광우 역의 박훈은 드라마 ‘법쩐’의 황기석 검사인가 눈을 비비게 할 만큼 새로운 마스크를 꺼냈다.
그밖에 언급하지 못한 영화나 드라마의 신스틸러를 포함해 어떤 배우를 선택해도 좋을 상황. ‘사냥개들’과 ‘이로운 사기’에서 동시에 만난 이해영과 최영준처럼 자주 발견되는 분들 말고, 영화 ‘밀수’의 김종수나 영화 ‘빈틈없는 사이’와 드라마 ‘형사록 2’의 고규필(현재 드라마 ‘가슴이 뛴다’도 방영 중)처럼 곧 또 만날 분들 말고, 이런저런 제외 사유를 생각하다 마음을 바꿨다.
만난 지 꽤 됐는데도 자꾸만 생각나는 사람, 언제 또 볼 수 있지 찾아보게 되는 배우로 정했다. 선택은, 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에서 순애의 언니, 이경애를 연기한 홍나현이다.
드라마를 보는데 갑자기 1987년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인물이 눈길을 콱 붙든다. 경애 씨는 미용실에 근무하는 데다 가수를 꿈꿔서인지 옷이며 머리며 화려한 매무새를 자랑하고, 동생 대학 등록금 마련해 줄 요량으로 ‘콩알’(홍나현의 별명)만 한 키에 미스코리아 출전을 꿈꾸는 당찬 아가씨다. 땅에 발 딛지 않고 반음은 떠 있는 것 같은 일상에 부모님 속을 불안불안하게 하지만, 엄마 아빠 여동생 남동생 누구 하나 빠짐없이 가족 생각하는 마음이 끔찍한 장녀다.
좋은 배우는 출연 분량이 적어도 그 인물의 전사가 별반 소개되지 않아도, 시청자가 마음속에서 출연 분량을 늘리고 머릿속으로 그의 인생 스토리를 상상하게 한다. 모두가 가벼이, 조금은 한심하게 대하는 시선 속에 그 쓰린 속은 어떨지 걱정하게 한다. 그리고 잘되길 응원한다.
그런데, 그런 경애 씨가 드라마 초반에 변고를 당한 거다. 자꾸만 보고 싶던 인물, 남몰래 아끼던 배우의 퇴장에 속이 부글부글. 사전제작 드라마니 살려내랄 수도 없고, 그저 회상 장면으로나마 더 나오기를 바랄밖에.
잃고 나면 가치를 안다고. 회상으로 등장하는 순간마다 볼수록 경애를 미워할 수 없게 하는 매력이 있고, 볼수록 흔하지 않은 ‘탄성 좋은’ 에너지를 지녔다. 정말 요즘 배우들은 준비가 잘돼 있구나! 감탄하다가 든 생각. 아, 그런데 이 배우 어디서 봤더라?
출연 이력을 보는데 딱 생각나는 배역이 있다. 영화 ‘엑시트’(2019)의 ‘셀카 청춘’ 역.
단역이었다. 10초도 되지 않는 짧은 등장, 단독 대사라곤 ‘야아아’ 감탄과 “셀카 셀카”. 재난이 본격화되기 직전, 도심으로 밀려드는 유독가스를 보고 멋지다고 생각해 철없이 뿌연 기체를 배경으로 셀피 사진을 찍는 여자 둘, 남자 하나의 세 친구. 세 중 오른쪽에 선 ‘여자5’가 홍나현이다.
스쳐 지나는 장면 같아도, 이런 대목에서 정말 해맑게 연기해 줘야 이후에 닥칠 재난의 심각성이 배가 된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엄지를 세우지 않아도 마음속 ‘엄지척’이 보이게 감탄하고, ‘세상에 이런 일이’에라도 제보하려는 듯 희귀해서 더 즐겁다는 듯 사진을 찍었다.
과거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초를 세야 할 만큼의 단역에 주로 캐스팅됐지만, 연극이나 뮤지컬에서는 아니다. 지난 2016년 경기도립극단의 제67회 정기공연 헨릭 입센의 ‘들오리’로 데뷔한 이래 스무 편 가까운 작품으로 무대에 섰고, 뮤지컬 ‘비틀쥬스’나 ‘비밀의 화원’으로는 관련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도 세 번째 출연인 뮤지컬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의 주인공 옥희 역에 트리플 캐스팅되어 공연 중이고, 오는 4일부터는 연극 ‘붉은머리 안’에 주인공 안 역을 다른 두 배우와 함께 맡아 교대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7월의 두 공연은 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 속 ‘우정리 연예인’ 경애 씨와의 빠른 결별로 아쉬웠던 마음을 해소할 기회다. 더불어 스크린과 안방극장에서도 더 자주, 오래 만날 수 있기를 앙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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