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 피포위 의식
변화는 불안정을 수반한다. 이언 브레머는 ‘J커브’라는 저서를 통해 한 나라의 개방성과 안정성에 얽힌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폐쇄된 국가가 개방을 하면 초기에 불안정성이 점증한다고 주장한다. 집권 세력이 전략적으로 잘 대응한다면 권력을 잃지 않고 다시 안정성을 되찾고 연착륙을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유혈사태 등을 통해 정권 붕괴로까지 이어지는 경착륙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과연 북한이 지금까지 변화해 왔고 개방의 길을 걸어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김정은 정권의 북한은 변화와 개방의 필연적 조건을 갖췄다. 일명 북한의 MZ세대라 불리는 ‘장마당 세대’ 이하의 연령대가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 외부 세상을 볼 수 있는 스마트폰도 600만대에 육박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마당이라고 불리는 종합시장도 전국에 400개 이상 운영 중이다. 북한의 변화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다.
김정은 정권은 권력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정권 유지를 위해 언제든 휘두를 수 있다. 단기적으로 통제체제가 작동할 수 있겠지만 마냥 억압과 감시라는 채찍만으로 정권을 유지하기는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북한 주민들이 바라는 안보적 불안감 해소와 경제 발전이라는 성과에 대해 과장도 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의 약속은 보여줘야만 정권의 안정적 유지가 가능하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 주민들의 기대치를 정권의 능력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주민 봉기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2018년 한·미 연합훈련 중단으로 시작된 군사적 긴장 완화는 북한 주민에게도 유엔 제재가 해제되고 경제적으로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까지도 가지게끔 해줬다. 북한 주민의 눈높이가 달라졌지만 그 순간 다시 한반도에서 평화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북한 군인이 총이 아닌 삽을 들고 건설 현장에 내몰린 상황에서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갈팡질팡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31일 노동당 전원회의 후 600㎜ 초대형방사포 30문 증정식을 거행하면서도 이전까지 트랙터를 생산하던 군수공업부문의 노동계급이 총궐기해 생산한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있었던 전원회의에서도 2022년 경제 분야 성과가 당초 설정한 목표에는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해 이른바 ‘대북 적대시 정책’ 탓으로 돌렸다. 핵무력을 강화하는 북한이 내세우는 논리가 자위권이다. 이는 소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피포위 의식(siege mentality)’이 깔려 있다.
피포위란 원래 적군에 포위된 상황을 말하는 군사개념이다. 피포위 의식은 실제 고립됐거나 압박받았다든지 공격을 당해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피해의식으로 인해 그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고 믿는 불안한 감정이나 심리 상태를 의미한다. 정보를 차단한 상태에서 외부 위협을 강조해 내부 결속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하기도 한다. 흑백논리에 빠져 외부를 늘 의심하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려는 특징을 보인다. 피포위 의식에 빠진 정치권력은 지도자 행동을 정당화하고 우월함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경향으로 흐른다는 점에서 북한 행태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북한의 피포위 의식은 많은 부분 자초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피포위 강박증에 사로잡혀 핵탄두를 늘리고 미사일을 쏘아대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분명 합리적 안보 우려도 존재한다. 평화가 사라진 한반도에서 안보적 자위와 경제적 자립은 충돌할 수밖에 없고 김정은 정권의 불안과 두려움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 핵을 가진 북한의 불안정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해서 될 일인지 모르겠다. 한반도에 함께 사는 우리에게 북한을 피포위 의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책임과 의무는 없는 것일까.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군사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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