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코리아] 학력고사로 변질된 수능

2023. 7. 3.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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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순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필자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초대 원장으로서 1993년 대학 입시에 수학능력시험을 처음 도입하는 데 일조했다. 수능은 대학 교육을 받는 데 필요한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고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따라 사고력 중심으로 측정하되 통합교과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하여 출제하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30년이 흐르는 동안 수능은 교과별 학력고사 형태로 변형됐다. 수능을 참고자료로만 쓰고, 논술, 고교 내신, 면접 등을 결합해 대학별로 자율적으로 입시 전형을 한다는 당초 의도는 물거품이 됐다. 최근 ‘킬러 문항’이 사교육 주범으로 부각되며 수능을 주요 대입 전형 자료로 활용하는 데 대한 엄밀한 검토가 필요해졌다. 이제 수능의 성격, 구성 요소, 기본 방향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 ‘통합교과적 사고력 평가’ 퇴색
킬러 문항, 과열 사교육만 부각
대입 전형 제도부터 새로 짜야

김지윤 기자

수능은 대입 전형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수능을 그 자체로만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대입 전형 제도에서 수능의 기능과 역할이 어떠해야 하고, 수능과 고교 교육과정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수능과 학습 부담 및 사교육비 문제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그 결정에 기초해 수능의 성격과 체제, 영역, 시행 방법 및 횟수 등이 마련돼야 한다.

수능을 재설계하려면 대학 입학 선발제도를 손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정리와 합의가 필요하다. 첫째, 대입 전형이 수험자의 서열을 강화하여 학력 향상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아니면 서열을 타파하거나 완화하면서 협동을 통해 학력을 향상하는 데 기여할 것인지 합의해야 한다. 교육의 수월성을 강조하면 학업성취도 중심의 입시 전형제도가 필요하고, 평등성을 강조하면 개개인의 잠재 능력이 핵심이 되면서 다양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둘째, 대학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능력주의와 평등주의 논리가 부딪칠 수밖에 없다. 대학이 사회 엘리트를 양성하고, 산업사회 요구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라고 규정하면 대입 전형제도에서도 우수한 능력을 갖춘 자의 선발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반면 대학이 보편인·교양인을 양성하는 곳이라면 대학에서 얼마나 교양인을 양성하는 데 적절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활용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대입 전형제도는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된다. 4차 산업혁명 시기에는 인성, 창의성, 비판적 사고력, 융합력 등을 가진 인재 양성을 위해 대학이 무엇을 가르치고,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셋째, 평가의 타당성이 중요한지, 평가의 신뢰성·공정성이 더 중요한지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타당성을 우선하면 대입 전형에서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변별이 중요해지는 반면, 신뢰성·공정성을 우선하면 난이도 중심의 숫자적 변별이 우선될 수밖에 없다. 특히 타당성을 중시하면 개괄적인 구분(등급 또는 절대평가제)이 강조되고, 신뢰성을 중시하면 불가피하게 세부적 구분(점수 또는 인위적 상대평가제)이 강조된다.

넷째, 대학 자율성이냐 고교 교육 정상화에 둘 것인지 합의해야 한다. 대입 전형제도가 고교 교육과 직접 연계되면 고교 교육을 좌우하게 돼 고교 교육 정상화를 저해할 수밖에 없다. 대입 전형제도가 고교 교육과 직접 연계되지 않으면 사교육이 성행할 가능성이 커진다.

다섯째, 과열 과외로 인한 사교육비 증가의 문제, 대입 전형제도로 인한 공교육 황폐화 문제, 진로 선택 시기 및 방법의 문제, 교육 대물림, 대입 시험으로 인한 비교육적 암기 위주의 문제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무엇을 먼저 해결할 것인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문가들이 제기된 문제들의 장·단점을 분석해 제안한 뒤 국민 숙의 과정을 거치는 게 바람직하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전문가 분석이나 국민 숙의 없이 대입 전형제도를 만드는 것은 문제만 확대 재생산할 뿐이다. 대입 전형제도를 만들기 전에 우리 교육의 우선순위를 사전에 정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그런 후에야 수능 존폐 여부나 성격, 포함되는 내용, 문제은행 방식을 포함한 출제 방법 등이 논의돼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도순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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