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맑은 강말금
Q : 오늘만큼은 ‘소년’으로 변신했어요. 어릴 때 강말금은 어떤 아이였나요
A : 중학교 때 늘 쇼트커트를 하고 다녔어요. 심지어 남자아이냐고 오해하는 분도 있었죠. 교복까지 입고 있으면 친구들이 꽤 좋아했던 것 같아요. 살다 보니 그런 보이시함도 꽤 옅어진 것 같네요.
Q : 배우 이름 ‘말금’은 친구에게 500원을 주고 샀다지요. 돌이켜보면 좋은 구매였나요
A : 어떤 이름이든 누군가 불러주면 자연스럽게 내 이름이 된다는 걸 느꼈어요. 고를 땐 신중하게 골랐지만, 다른 이름이어도 괜찮았을 것 같긴 해요. 일단 제 본명 강수혜와 구분돼 좋습니다. 요즘 거의 모든 사람이 저를 말금이라 불러서 이 이름에 더 익숙해요. 본명은 식구들만 부르죠(웃음).
Q : 잘 지었어요. 그 이름으로 늘 굴곡진 삶에도 맑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그려왔으니까요. 아무래도 최근 기억에 남는 여자는 〈나쁜엄마〉의 정 씨겠지요
A : 정씨가 참 좋은 역할이거든요. 대본에서 그녀의 희로애락이 춤추는데, 써주신 만큼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날이 꽤 있었어요. 맘고생을 많이 해서 마지막 촬영 때는 후련했지만, 또 마지막 방영을 앞두고는 좋은 작별을 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 식구들과 선배님들, 극중 딸래미와도 너무 애틋했으니, 힘듦마저 추억으로 바뀐 거죠. 바로 애정의 문자 날렸습니다.
Q : 고민이 깊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만
A : 정말 잘하고 싶었고, 욕심이 커서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눈물을 쏟다가 정작 나에게 카메라가 왔을때 울지 못한다던지, 그런 부분이 참 속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래도 열심히 했어요. 어쩌면 편집을 잘해주신 걸까요?
Q : 60대 분장에도 어색함이 없었어요
A : 짧은 뽀글이 머리는 일 많이 하는 시골 아주머니들의 상징이잖아요. 분장 테스트를 할 때 가발을 더 잘랐고, 흰머리를 풍성히 심었고, 심지어 가슴 보형물까지 착용했어요. 가슴이 처진 느낌을 내려고요. 첫 촬영을 하고 좀 과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요즘 60대면 참 젊은데 말이죠. 조금씩 덜어내니 현실감이 살더군요.
Q : 배우 라미란, 서이숙과의 케미스트리가 ‘끝장’났어요. 딸 역의 안은진을 포함해 극중 조우리 마을의 여자들을 자랑해 본다면
A : 미란 언니는 현장에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웃겼어요. 오늘은 어디서 밥을 먹을지 계속 검색하다가도 카메라가 돌면 바로 눈물을 쏟아내죠. 팀의 화합에 에너지를 쏟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그 과정에서 라미란이란 배우의 멋을 느꼈습니다. 이숙 언니는 거의 선생님에 가까운 선배인데, 언니처럼 대해주셨고요. 마지막 회 재판 촬영에서는 케미의 ‘정수’를 느꼈어요. 은진이는 정말 독보적 귀여움을 자랑하는데, 현장에서 ‘리틀 라미란’으로 불려요. 말랑말랑하고, 늘 열려 있달까요.
Q : 정 씨와 닮은 점이 있나요
A : 눈치를 많이 본다는 점? 사실 저보다 돌아가신 이모를 떠올렸어요. 어린시절 없는 살림에 뻔질나게 가서 밥을 얻어먹었는데도 제가 먹는 걸로 눈치 본 기억이 없어요. 이모는 그 동네 아주머니들과 종일 수다 떨다가, 갑자기 화를 내다가, 갑자기 웃는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어요. 하지만 언제나 거기 계셔서 힘든 사람이 찾아갈 수 있는.
Q : 마지막 회에 트롯백 역의 백현진과 로맨스가 있었죠? 전작 〈신성한 이혼〉에서 김성균과의 로맨스도 대단했고요. 로맨스에 열망이 있나요
A : 〈신성한 이혼〉에 로맨스가 있다고 해서 너무 기뻤고, 상대가 김성균이라 다시금 감사합니다(웃음). 지금 저도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좀 됐는데, 마흔이 넘으니까 그 사람이 정말 귀한 거예요. 매일 ‘아이고 예뻐라’ 그래요. 그런 감정을 작품에서도 표현하고 싶었어요. 더 젊었을 때 만났다면 상대의 단점만 낱낱이 꿰겠지만, 이대로 나이가 저물 줄 알았다가 좋아하는 대상이 생기니 귀하디귀하고, 마냥 아끼고 싶은 느낌 말이죠.
Q :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은 ‘진짜 같은 얼굴’ 때문에 당신을 찬실이로 캐스팅했다던데 ‘진짜 얼굴’은 어떤 걸까요
A : 고생한 얼굴이라는 건지(웃음)…. 답은 모르겠지만, 만약 제게 그런 얼굴이 있다면 그걸 계속 간직하고 싶다, 나답게 계속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어요.
Q : 그간 연기한 여성 중 가장 비슷하고, 애틋하게 느껴지는 인물은
A : 아무래도 찬실이. 당시 나이도, 처지도 비슷했고요. 저는 힘들 때 오히려 밝아져요. 찬실이도 황무지에서 죽지 않고 웃으면서 딱, 힘을 내잖아요.
Q : 실제 강말금은 어떤 여자인가요
A : 제 MBTI를 잘 까먹는데요. ‘I’라는 건 기억해요. 핑곗거리로 좋아요. 주변에 잘 못하는 것 같아 미안했는데 ‘I라서 그래!’라고 할 수 있거든요(웃음). 제가 흠도 참 많은데, 내가 나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내 편인 것 같아요.
Q : 음주가무는 어떤가요. 작년 여름 천용성의 ‘보리차’라는 곡에 피처링했는데,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포크-노래를 수상했죠
A : 다소 쇠퇴했습니다. 20대 때는 노래방 가수였고, 30대에는 가무보다는 ‘음주’에 집중했어요. 가무는 수줍다 보니 음주 후 시도하죠.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면 신나요. 김초희 감독도 제가 소주를 마시고 나서 좀 풀어지는 걸 보고 “말금이는 소주다”라고 했어요.
Q : 서른에 회사를 그만두고 극단에 들어갔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서른의 강말금을 부추길 것인지 혹은 말려볼 것인지
A : 스무 살에 꿈이 생기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군가는 새로운 것과 인연을 맺고, 누군가는 그 꿈을 쥐고 다른 세계를 차단해요. 저는 후자였어요. 공교롭게도 다른 인연이 닿을 기회도, 다른 세계로 초대될 일도, 정말 괜찮은 남자를 만나 결혼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죠. 새로운 걸 열심히 배우지도 않았고요. 그러다 서른이 되니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렇게 그대로 살면 안 됐던 것 같아서 부추기겠습니다.
Q : 영화를 향한 애정은 얼마큼 크나요
A : 20대 때 더 열렬히 좋아했어요. 정말 아름다운 시기가 있었죠. 왕가위의 영화,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봉준호와 박찬욱의 재능이 터져나오던 시절…. 그때는 눈이 멀었었어요. 우울증 걸린 환자처럼 직장에 앉아 있다가 해운대 시네마테크에서 영화 한 편 보면 또 눈이 멀어서 돌아와요. 색채보다 더 강렬한 감정들 때문에요. 지금은 영화가 업이자 삶이 돼 제 취향만 고집할 수 없고, 감동도 잘 잊네요(웃음).
Q : 이제는 삶이 된 영화가 지닌 마법 같은 힘은 뭘까요
A : 〈천하장사 마돈나〉를 다섯 번 보고 회사를 그만둔 게 한두 달에 걸쳐 일어난 일인데, 그 자체가 마법이죠. 좋아하던 극단에 메일을 썼어요. 당시 정말 연약했던 제게는 너무 큰 한 걸음이었어요. 그런 용기를 줬기에 〈천하장사 마돈나〉가 인생 영화예요.
Q : 좋아하는 또 다른 한국 독립영화가 있나요
A : 최근 본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와 재작년쯤에 본 〈남매의 여름밤〉이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모녀가 분리되는 과정을 그리는데, 인간관계에서 거리감이란 무엇인지 다뤄요. ‘모녀’라는 주제라도 영화가 구체성을 띠지 않거나 관념적이라면 와닿지 않을 수 있는데 수작이죠. 또 〈기생충〉의 박명훈 선배님이 발굴된 〈재꽃〉이라는 영화도 좋았어요. 말은 아낄 테니 꼭 보세요.
Q : 어떤 이야기가 세상에 많아지길 바라나요
A : 어쩌면 찬실이 같은 영화. 사실 독립영화에서는 젊은 작가들의 자전적인 얘기가 많다보니 다소 나이든 사람이 주인공인 얘기가 적어 아쉬워요. 더 다양한 연령대의 이야기가 많아졌으면. 물론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요.
Q : 6월 말 드라마 〈기적의 형제〉로 다시 시청자들과 만납니다. 이번엔 첫사랑의 얼굴이라죠
A : 정 씨와는 전혀 다른 여자예요. 27년 만에 실종됐던 남친을 만납니다.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한, 마치 아들 같은 남친을 만나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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