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디렉터 전채리의 화병들 #더컬렉터스
하나의 작은 사물이 무한한 기억과 감동으로 확장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어떤 여행지의 추억과 관계가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것과 마주했을 때의 감정, 그때의 날씨와 장소,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들이 하나의 실마리가 풀리듯 천천히 연결되게 마련이다. 아이덴티티 디자이너이자 아트 디렉터로서 ‘스튜디오 CFC’를 운영하는 전채리 대표는 그런 마음을 느낀 후부터 어딘가로 떠날 때마다 작은 물건을 고른다.
누군가의 손으로 차분히 빚어낸 도자기의 느낌이 좋아서 하나둘 고르다 보니 어느새 그들이 꽃병이라는 영역으로 묶이게 됐다. “특정 브랜드나 디자이너 같은 조건을 두진 않아요. 구입하는 장소와 이유도 매번 달라집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트렌디한 편집 숍에서 고르기도 하고, 할머니가 운영하는 오래된 빈티지 숍에서 극적으로 발견할 때도 있죠. 제 꽃병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을 찾자면 유기적 형태예요. 항상 인체나 자연의 곡선을 닮은 풍부한 라인에 매혹돼 집으로 데려올 결심을 하죠.”
모든 꽃병은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 안전하게 갖고 오는 것이 최대 난제다. 정말 놓치기 싫은 꽃병을 크기나 무게 때문에 포기하는 일은 셀 수 없을 정도. 호주에서 구입한 레진 소재 꽃병은 너무 꼼꼼하게 포장하는 바람에 공항 검색대에서 흉기로 오해받은 적도 있다. 그래도 여정 끝에 ‘핸드 캐리’해 집에 무사히 데려온 꽃병을 다른 꽃병들 사이에 내려놓을 때면 힘들었던 순간은 금세 잊힌다.
하나씩 선택할 때는 몰랐지만, 개수가 40개에 달하는 지금은 하나의 스타일로 귀결되는 느낌도 든다. 잿빛을 더한 듯 낮고 차분한 컬러 톤과 알갱이가 있는 듯한 텍스처를 가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다른 도시의 기억을 박제하기 위해 한 점씩 모으기 시작했지만, 독일 디센에서 작업하는 이민수 · 김보경 작가와 허상욱 작가의 분청사기 꽃병은 떠나는 일과 상관없이 늘 관심을 두는 아이템이다.
“앞으로는 지역색이 더 강하거나 그 도시에 특화된 꽃병을 모으고 싶어요. 로컬 아티스트의 작은 작품도 좋겠죠. 일전에 리버티 백화점에서 어렵게 들고 온 꽃병이 이듬해 국내에 수입된 걸 보고 조금 허탈했거든요.” 예전에는 직업상 컬러와 그래픽의 조합에 몰두했던 전채리는 이제 그림과 건축, 재료의 본질적 물성을 향해 시선과 취향을 확장하는 중이라고 한다. 어쩌면 꽃병도 그 연장선일지 모른다. 집과 스튜디오에서 조금씩 비중을 늘려가고 있는 꽃병은 그녀에게 하나의 세계이자 또 다른 아카이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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