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 보이죠? 근데 여기, 보통 우체국이 아니랍니다

월간 옥이네 2023. 7. 2.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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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살린 '빨간 제비'... 주민·행정 힘 모아 60년 역사 우체국 지켜내기까지

[월간 옥이네]

 충북 옥천 안남우체국. 안남면사무소 건물 1층에 자리했다.
ⓒ 월간 옥이네
 
5월 충북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 마을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처마 밑에서 지저귀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포르르 바삐 움직이는 작은 손님. 멀리서부터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제비다. 이곳에 그 못지않게 반갑고도 주민들에게 친숙한 또 하나의 제비가 있다는데... 한때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주민들이 힘을 모아 되돌려 왔다는 '빨간 제비'다.

안남면 60년 지기 '빨간 제비'

60여 년 전부터 먼 곳에서의 소식과 선물을 전해주던 존재. 빨간 제비란 안남면 주민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준 '안남우체국'이다. 이곳이 위치한 곳은 1층 오른쪽 공간. 아담하지만 우편, 예금·보험 창구가 살뜰히 놓였고 김미영 국장과 최유진 주무관이 상주하며 업무를 보고 있다. 

"안남우체국의 가장 큰 특징은 안남면사무소가 우체국 장소를 무상으로 대여해주고 있다는 거죠. 전국에서 유일한 사례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안남면사무소가 우체국 자리를 선뜻 내주기까지 그 이면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덕분에 면사무소 직원들도, 주민들도 두 가지 업무를 볼 때면 편리하게 두 장소를 이용한다. 우체국에 상주하는 두 사람 역시 찾아온 이들을 편안하게 대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60대 이상 어르신 고객이 대부분으로 금융업무보다는 택배 접수를 위해 찾는 경우가 더 많다. 그중에는 멀리 거주하는 70대 딸에게 직접 기른 머위를 보내는 90대 아버지도, 타국에 사는 가족에게 선물을 보내는 이주 노동자도 있다. 

"(택배를) 보내는 손길에서 애틋한 마음이 전해질 때가 많아요. 그 마음이 잘 전해지도록 도와드리는 게 저희 역할이죠. 접수된 택배는 매일 오후 5시에 이곳을 빠져나가요. 대전물류센터, 중부광역물류센터를 거쳐 전국으로 운송됩니다. 금융업무는 하루 평균 10건 정도 있어요." 

옥천우체국에서 근무하다가 지난해 이곳으로 발령받았다는 김미영 국장이다. 그와 함께 1년 6개월간 합을 맞춰온 최유진 주무관은 안남우체국에서 주민들의 정을 담뿍 알아가고 있다. 우체국을 찾는 주민들이 종종 농산물이나 반찬을 나누어주곤 하는 것. 이미 우체국 냉장고에도 이들이 전해준 김치가 들어있다. 
   
 충북 옥천 안남우체국 김미영 국장과 최유진 주무관
ⓒ 월간 옥이네
 
마을에 생겨난 별정우체국

안남우체국은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인 1962년, 별정우체국으로 시작됐다. 6.25전쟁 이후 모든 것이 폐허와도 같던 시절. 읍·면 지역까지 구석구석 소식을 전해줄 우체국의 필요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졌지만, 부족한 재정 탓에 정부 차원에서 건물을 짓는 것은 어렵던 시기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별정우체국'. 정부는 개인이 자가부담으로 마을에 건물과 시설을 갖추면 체신부장관이 공공 우체국으로 지정,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승인하는 방식을 택했다. 

1961년 이러한 제도가 시작되자 전국 곳곳에서 우체국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읍·면 별 부유한 가문이 토지를 희사하고, 건물을 지어 주민들을 위한 우체국을 세웠다. 시행 6년 만에 전국 800여 곳의 별정우체국이 생겨났고 주민들은 덕분에 중요한 소식을 발 빠르게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뿐 아니라 우체국 건물 소유자는 지방우정청에서 시행하는 시험과 면접을 거쳐 우체국장으로 임명됐고 임명된 국장은 이곳의 임직원을 채용했으니, 별정우체국의 등장은 마을 새로운 일자리의 등장과도 같았다. 

곧 집배원 3명과 상주 직원 2명, 국장과 차석을 포함해 7명이 안남우체국의 일원이 됐다. 이들은 우정직 공무원은 아니지만, 별정우체국법에 의해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우체국장 자리는 가업처럼 아내나 자녀에게 승계할 수 있었다. 안남우체국은 고 김삼순씨가 초대 국장을, 그의 아내 백숙희씨와 아들인 김동백씨가 국장직을 이어받아 운영해왔다. 

"우체국 이전부터 대를 이어 안남초등학교, 안남면사무소, 옛 옥천경찰서 안남지소 부지를 내어주며 마을 발전을 위해 힘써온 가문이죠. 옛날엔 연주리 대부분 땅이 이들 소유였을 만큼 대단한 가문이었어요."

광산 김씨 문중을 일컫는 이야기다. 단순히 부유했던 것뿐 아니라 이웃을 돕고 봉사에 앞장섰기에 이들 문중은 오래도록 안남면 주민들에게 회자됐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마을에는 4대에 걸친 이들의 공덕비와 효자비가 전설처럼 남아있다.

"우체국이 마을 중심지에 있는 데다 임직원이 주민들로 구성됐으니, 안남우체국은 동네 사랑방과도 같았지요. 실내에 모여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가끔은 뒷마당에서 생선 잡아 온 걸 끓여 먹고 고기 구워 먹고, 백숙해 먹고 그랬어요. 여름이면 같이 물놀이 다니기도 하고 재미있게 어울려 다녔지요." 

옛 안남우체국 건물 인근에서 30여 년째 건강원을 운영해온 김대영(56)씨다. 그도 이곳의 주민으로서 우체국을 애용했다. 편지나 전보는 물론, 우체국 예금을 들어 금융업무를 보기도 했다. 김대영씨의 세 자녀도 우체국 예금을 들어 꿈을 키웠다. 

"그 시절에는 자녀들이 초등학교 입학하면 손잡고 우체국 가서 통장을 만들어 주곤 했거든요. 졸업할 때까지 우체국 통장에 자녀 용돈 조금씩 넣어주는 집들이 많았죠." 

퇴직 집배원 박창용씨
 
 퇴직집배원 박창용씨
ⓒ 월간 옥이네
 
박창용(67)씨는 20대 초반부터 9년 전 퇴직하기까지, 안남우체국에서 36년간 집배원으로 근무했다. 안남우체국의 시작을 옆에서 바라보았고 한때 직원으로, 퇴직 후에는 고객으로 함께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안남우체국의 역사다. 

"우체국 오기 전에는 잠깐 서울서 숟가락 만드는 공장에 다녔어요. 그런데 서울 온 지 한 달도 채 못 됐을 때, 어머니가 직접 서울에 올라오셔서 고향에 다시 가자고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안남우체국에 집배원 자리가 생겼다는 거였죠." 

어머니 손에 이끌려 부랴부랴 고향에 돌아온 1978년 11월. 그렇게 박창용씨의 집배원으로서의 인생이 시작됐다. 동료 집배원 두 사람 역시 동네 이웃이었는데, 이들 앞으로는 경찰 제복을 닮은 남색 유니폼에 갈색 우편 가방, 빨간 자전거가 놓였고 그는 곧 안남면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그는 매일 아침 7시부터 할당 우편물을 다 전하기까지 안남면 구석구석 마을을 다녔다. 

"1980년 대청댐 생기기 전에는 안남면 행정구역이 지금보다 넓었어요. 안내면 오덕리나 옥천읍 오대리도 그때는 안남면이었지요. 두 군데가 멀어서 제일 다니기 힘들었어요. 오덕리는 또랑 하나를 경계로 보은(삼승면 원남리)과 구역이 나뉘었을 정도니까요." 

오덕리와 오대리는 현 도로를 이용해도 자전거로 1시간가량 걸리는 거리(약 15km)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던 당시에는 지금보다 상황이 더 어려웠을 터. 오덕리에는 신생약방, 방앗간 등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가게가 있었기에 우편물이 많았고, 박창용씨는 거의 매일 이곳으로 향했다. 드링크류를 제외한 의약품 운송도 집배원의 몫이었다. 

"오덕리는 자전거 대신 버스 타고 다니곤 했어요. 먼 데다 짐도 많았으니까요. 옛날에는 버스들이 집배원 보면 돈 안 받고 그냥 태워줬죠. 지나가던 차들도 멈춰서 '어디까지 가시냐'면서 데려다주시고요."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 안내원이 있고 도로에는 차가 드물던 시절이다. 오대리로 향할 때는 연주리 피실 선착장에서 배를 탔다. 겨울에 호수가 얼면 직접 걸어 들어가 배달하거나 마을로 향하는 주민들의 손에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때도 있었다. 우편물은 신문 혹은 고지서가 가장 많았고 편지나 경조사를 알리는 전보, 소포도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우편물이 가장 많던 때는 대청댐이 들어서기 직전이다. 수몰이 예정된 마을주민들에게 토지와 주택 보상 관련 우편물이 전해졌던 것. 집배원 일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우편물이 수북하게 쌓였다. 그에게도,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해 들은 주민들에게도 가장 괴로운 시기였을 테다. 

"그땐 너무 힘들더라고. 편지나 좋은 소식 전해줄 때는 주민들도 반가워해요. 고지서나 좋지 않은 소식 담은 전보 전해줄 때는 나도, 받는 이도 별로 달갑지 않았지." 

밤늦게 전보를 전하거나, 눈빗길에 때로는 미끄러져 넘어지는 일도 있었다. 몸이 고되고 일하는 강도에 비해 보수도 박했지만(첫 월급 4만7500 원),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일을 다 마친 뒤에는 동네 또래들과 강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뛰어나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나 몰라. 그땐 나도 20대였고 어렸으니까 가능했던 일일 테죠." 

박창용씨의 일상 풍경은 하루하루 바뀌었다. 대청댐이 생기며 몇몇 마을이 사라졌고, 1984년 무렵부터는 집배원들에게 운송수단으로 자전거 대신 오토바이가 제공됐다. 비포장도로는 평평한 포장도로로 변했고 사람들을 울고 웃게 했던 전보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가정집마다 전화와 컴퓨터가 놓이면서 우편물 중에 손편지를 찾아보기란 어려워졌다. '체신의 날'이라 부르며 집배원들이 하루 쉬며 놀던 날도 어느 순간부터는 '정보통신의 날'로 불리기 시작했다. 20대의 젊은 청년이던 박창용씨 역시 어느덧 장성한 자녀를 둔 중년이 돼 있었다. 
 
 박창용씨가 집배원으로 근무할 당시 모습
ⓒ 월간 옥이네
 
소문과 함께 찾아온 폐국 위기

마을에 뒤숭숭한 소문이 들려온 것은, 박창용씨가 퇴직을 앞둔 시점이었다. 안남우체국이 폐국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었다. 2017년 초 안남 별정우체국장이 개인 파산 선고를 받으면서 폐국 가능성이 높아졌고 마을은 큰 충격에 빠졌다. 오래전부터 안남면을 지탱해오던 든든한 가문이 위태롭게 된 데다 주민 편의에 꼭 필요한 시설이 사라진다면 일상생활에도 타격이 크기 때문이었다. 결국 개인 파산이 확정되면서 기존 별정우체국 건물은 압류, 안남우체국은 존폐의 갈림길 앞에 섰다. 

"당시 주민들이 많이 힘들어했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도 있었고 마을 분위기가 좋지 않았어요. 이러한 상황에 마을 우체국마저 사라진다면 주민들의 상실감은 더욱 심해졌을 테죠. 어떻게든 우체국을 살리고 싶어했어요. 전화나 인터넷이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택배를 보낸다거나 우편물을 보낼 때, 금융업무를 할 때면 필요한 게 우체국이니 말입니다." 

김대영씨는 폐국 위기 당시를 회상했다. 별정우체국 경영수지가 적자인 상황에서 별다른 조치가 없다면 폐국되는 것이 당연했지만, 주민들 사이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그 대안으로 민간 우편취급국 위탁 혹은 일반우체국으로 전환하는 방법이 등장했다. 우편취급국으로 전환될 경우 그 지위가 강등돼 금융업무를 볼 수 없고 우편·택배 업무가 축소된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에 일반우체국 전환은 모든 기능이 유지되고 기존보다 공공성이 높아지는 것이기에, 가능한 최선의 결과였다. 

주민들과 안남면 여러 단체는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안남면 이장협의회에서는 '일반우체국 전환을 위한 주민 서명 운동'을 벌여 주민 500여 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안남면 인구가 1500명이 채 되지 않으니 전체 주민 중 3분의 1에게 서명을 받아낸 셈이다.

주민들이 움직이자 행정·정치 영역에서도 협조가 이어졌다. 당시 신강섭 옥천군 부군수, 박덕흠 국회의원 역시 일반우체국 전환을 위해 충청지방우정청 측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협상에 나섰다. 곧 우정청에서 '지자체가 부지와 건물을 제공할 경우 일반우체국 전환을 고려하겠다'는 답변이 왔고 안남면사무소는 일부 공간을 우체국부지로 내어주는 것에 동의했다.

숨 가쁜 논의를 끝으로 제비가 날아들던 2017년 5월 8일. 마침내 지금의 안남우체국이 생겨났다. 폐국 논의가 시작된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따로 개국 행사를 열어 마을 주민들이 다같이 축하했지요. 무언가 함께 해냈다는 기쁨에 떠들썩했습니다." 

전국에서 이처럼 폐국 위기를 극복하고 일반 우체국으로 전환한 사례는 없었다. 이전까지는 경제성 악화로 별정우체국이 문 닫을 경우, 별다른 대안 없이 폐국되는 것이 일반이었다. 안남우체국은 민·관과 우체국이 소통하며 '공간 공유'를 통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범 사례로 우정사업본부 내에서 평가받고 있다. 

빨간 제비, 영원하길
 
 충북 옥천 안남우체국 모습
ⓒ 월간 옥이네
 
어렵게 지켜낸 만큼 더 소중한 안남우체국이다. 수익 창출 측면에서만 보았다면 벌써 문을 닫아야 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 그 의미를 생각할 때 안남우체국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주민들은 안남우체국을 바라볼 때마다 지난 일들을 떠올릴 테다. 함께 웃고 울었던 기억, 그를 통해 전해 들었던 수많은 소식, 치열했던 젊은 시절을 말이다. 동시에 그것이 여전히 깨끗한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위안을 받을 테다. 물론 종종 방문해 택배를 접수하고, 우편물을 보내고, 금융업무를 볼 수도 있다.

지난해 12월, 새마을금고 안남지점(안남면 연주리)이 문을 닫은 이후로 마을 금융기관으로서 안남우체국의 위치는 더욱 중요해졌다. 

"안남우체국의 존재가 실질적으로도 큰 도움이 돼요. ATM 기기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기계 조작이 익숙지 못한 어르신들에게는 '있으나마나'예요. 다른 금융기관으로는 농협뿐인데, 그마저도 이전에는 안남농협이었다가 안내·안남농협, 대청농협으로 합병된 상태죠. 안남 지점으로 이름이 남은 건 우체국뿐인 거예요." 

김대영씨의 말대로 새마을금고 안남지점 앞에는 지점폐쇄 안내문이 붙어 썰렁한 분위기가 감돈다. 박창용씨는 여전히 '임대'라 써 붙인 옛 안남우체국 건물 앞을 지나 걸어가며 말한다. 

"그래도 우체국 덕분에 내가 지금껏 식구들 먹여 살리며 일할 수 있었죠. 아픈 기억도 있지만 고마운 마음이 더 큽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기로 했어요. 우리 마을의 소중한 우체국입니다." 

오후 5시, 마침 빨간 제비가 그려진 우체국 차량이 마을 어귀를 돌아 나선다. 곧 전국 곳곳으로 전해질, 정이 담긴 택배를 가득 실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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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집배원에게는 할일이 하나 더 있다 https://omn.kr/24jye

월간옥이네 통권 72호(2023년 6월호)
글·사진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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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안남우체국 건물
ⓒ 월간 옥이네
 
 60여 년 전부터 먼 곳에서의 소식과 선물을 전해주던 존재이자, 안남면 주민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준 '안남우체국'이다.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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