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도 유기 아닌 보호로 인정"...베이비박스 '무죄' 나온 이유
“이제 쏟아질 출생미신고 아동 중에 베이비박스도 많을 텐데, 유기죄로 보기엔 사회적으로 참 난해한 문제죠.”
정부의 출생미신고 아동 전수조사 이후 관련 수사를 다수 맡은 경기남부경찰청 관계자가 지난달 30일 꺼낸 말이다. 2009년 12월 국내에 베이비박스가 처음 생긴 이래 이어져온 ‘유기죄’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최근 인천 계양·경기 시흥 등 전국 곳곳에서 베이비박스를 거쳐간 아이들 중 일부가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채 살아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경찰은 해당 부모들에 영아유기·아동복지법 위반 등 혐의가 성립하는지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 2015년 인천 계양구에서 태어난 딸을 출생미신고 상태로 경기 군포의 베이비박스에 맡긴 친모를 입건 전 조사(내사) 중인 인천경찰청 관계자는 “똑같이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간 경우라도 어떤 사람은 유죄고 어떤 사람은 무죄일 수 있다”며 “곧장 보호될 수 있는 시설에 맡겼는가, 아이의 생명·신체에 위협이 없었는가, 부모가 피치 못할 궁박한 사정이 있었는가 등을 사건마다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생명보호가 죄냐” 신림동 베이비박스 가보니
실제로 운영되는 베이비박스는 전국에 2곳뿐이다. 서울 신림동의 주사랑공동체, 경기 군포의 새가나안교회다. 베이비박스로 잘못 알려진 부산 홍법사의 경우, 입양 주선 없이 원가정에서 아이를 키우도록 상담·지원을 제공하는 형태다. 먼저 생긴 주사랑공동체의 베이비박스를 거쳐간 아이는 지난 14년간 2094명이다(지난달 29일 기준). 최근 3년 기준으론 매년 100여명 수준이다.
이곳엔 상담 체계가 있다. 자격을 갖춘 상담사·보육사·사회복지사 등이 아이를 맡기러 온 부모들에게 직접 기르도록 우선 설득하고, 10대 출산이나 가난 등으로 키울 수 없는 경우엔 보호시설이나 입양 희망 가족을 추천해 결정케 하는 절차다. 노란 베이비박스 문을 열면 즉시 벨이 울리고, 안쪽 문으로 아이를 받는 직원과 뛰어나가 부모를 만나는 직원이 24시간 상주한다.
14년간 이곳을 지킨 이종락 목사는 “죽일 뻔 했던 아이를 데리고 울면서 찾아오는 부모도 많다. 베이비박스는 부모가 아이를 지키러 오는 마지막 장소”라며 “이 아이만큼은 살려달라, 보호해달라고 찾아오는 게 어떻게 유기인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안 그래도 2012년 도입된 입양특례법 때문에 출생미신고 아동은 입양·보육원에 갈 수 없게 됐는데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맡기는 것까지 범죄화하면 오갈 데 없는 산모와 아이는 더 위험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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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판례 보니…집행유예 9건, 무죄 1건
베이비박스 유기 혐의로 친모·친부가 재판을 받은 최근 판례 10건을 들여다본 결과 대부분(9건) 유죄 판결이 나왔지만 실형으로 이어진 경우는 없었고, 무죄 선고도 1건 있었다. 집행유예를 선고한 대부분의 판결이 “유기 장소가 비교적 보호받을 수 있는 곳”임을 참작했다. 아이가 결국 사망한 치사 사건 2건에서도 재판부는 부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친모가 자택 화장실이나 고시텔에서 홀로 아이를 낳는 등 사회적·정신적으로 불행한 환경에 놓여있었다는 게 기소된 이들의 공통점이었다.
특히 지난해 7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처음 나온 무죄 판결은 그대로 확정돼 눈길을 끌었다. 친모가 2018년 7월, 2021년 4월 각각 영아 1명을 주사랑공동체 베이비박스에 두고 온 사건이었는데, 재판부는 “교회에 아기를 돌보고 보호하는 사람이 항상 상주한 점, 친모가 바로 떠나지 않고 담당자와 상담을 거친 점” 등을 무죄 판단의 근거로 활용했다. 당시 변론을 맡았던 연취현 변호사는 “전수조사 이후 겁에 질린 엄마들의 상담 요청이 많이 온다”며 “법원은 베이비박스가 아이를 보호하는 시설이고, 위기임신·출산 등으로 절박한 부모의 행위가 유기가 아닌 보호 의뢰라는 것을 일차적으로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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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미혼모단체 “양육포기 조장하는 불법시설”
반면 베이비박스가 양육 포기를 부추긴다는 비판도 여전하다. 김희진 변호사는 “당장 양육이 어려울 때 아이를 맡길 베이비박스가 너무 쉽게 찾아지는 게 문제”라며 “사실상 양육 포기에 기여한다”고 지적했다. 박영의 세이브더칠드런 매니저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2019년 정부에 베이비박스 금지를 촉구했다”며 “익명으로 아동 유기를 허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합법시설이 아니다(김민정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란 점도 지적됐다. 이에 대해 주사랑공동체는 “수없이 합법화를 요청했지만 외면당했다. 진짜 불법이었다면 철거됐겠지만, 구청·경찰과 매번 협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찬반 양측이 공통으로 요구하는 건 적극행정이다. 김민정 대표는 “애초에 정부·지자체가 미혼모 등이 양육을 포기하지 않도록 전폭적 지원을 해줬다면 베이비박스를 민간에서 불법으로 자비 운영할 일도 없다”고 말했다. 배지연 대전대 사회복지학 박사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태어나는 아이들, 아이를 키울 수 없는 부모들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베이비박스가 미혼모·혼외자·외국인·장애아 등에 대한 제도공백을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유기가 아닌 보호 인계 차원으로 보이는 경우엔 불입건·불송치도 많다. 사건마다 여러 사정을 종합해서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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