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m 차이로 달라질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미래 [우리 도시 에세이]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경기 수원의 대표 이미지는 단연코 화성(華城)이다. 조선 르네상스라는 정조 치세, 새롭게 창출된 도시 공간을 그 상징으로 세웠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런 측면에서 화성을 가진 수원은 아테네나 로마처럼 분명 복 받은 도시임이 분명하다.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를 신원하려 한다. 정통성 회복이다. 왕은 세손으로 정통성에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왔다. 1789년 아버지 능을 서울시립대 인근 배봉산에서 화성 화산(花山)으로 이장하면서 장헌(莊獻)세자로 추존한다. 능도 영우원(永祐園)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쳐 부른다.
▲ 화성전도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된 화성. (거리전시물에서 촬영) |
ⓒ 이영천_거리전시물촬영 |
이런 배경에서 당시 왕은, 신도시 화성을 구상(1789년)하고 실행(1794∼1796년)에 옮긴다. 철저한 계획도시다. 효를 앞세운다. 아버지 능이 옮겨 간 곳에 살던 백성을 신도시로 이주시킨다. 이들이 최초 수원시민인 셈이다. 수원은 이처럼 화성에서 배태하였다.
성과 행궁동
▲ 행궁동_행궁앞 팔달산 정상 서장대에서 바라 본 행궁 앞의 행궁동. |
ⓒ 이영천 |
공간은 뛰어난 문화유산인 화성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이 유산들이 230년이란 굴곡의 역사를 겪으며 온전했을 리 만무하다. 성곽과 문화재가 제 모습을 찾게 된 계기는 기록으로 남은 한 권의 책 덕분이다.
▲ 행궁동_장안문 팔달산 정상 서장대에서 바라 본 붂쪽 장안문 방향의 행궁동. |
ⓒ 이영천 |
행궁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손에 낙남헌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 자리에 민가는 물론 학교와 병원, 군청과 재판소, 우체국, 경찰서가 들어선다. 1989년 시민 자율로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열망이 제기되어 1996년 복원이 본격화한다.
▲ 화성 행궁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받은 화성 행궁의 조감 사진. 사진 우측 상단에 신풍초등학교가 남아 있는 모습으로 보아 복원이 완료되기 전 모습으로 보인다. 1996년 본격화된 복원은 지난 2022년 완료됐다. |
ⓒ 문화재청 |
수많은 갈등과 해결이란 지혜를 찾아가면서, 행궁은 지난 2022년 드디어 완전한 제 모습을 찾는다. 특히 초등학교 이전이 화두였다. 1백여 년 전통을 지키려는 학교 동문회 반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소의 역사성은 쌓아온 시간만큼 두텁다. 그만큼 지나온 시간을 지워내기가 쉽지 않다.
일제 강점기 도로와 택지 조성 명분으로 사라진 팔달문 좌우 성벽의 복원 역시, 여전히 갈등의 씨앗으로 남아 있다. 2030년까지 복원한다는 계획으로 사유지 매입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상권 붕괴와 공간단절을 우려하는 의견도 만만찮은 실정이다. 한국전쟁 중 문루(궁문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절반이 파괴된 장안문의 처참한 사진은 우리 뇌리에 깊인 각인된 이미지 중 하나다.
▲ 팔달문 일원 사진 좌측 상단 성벽과 중앙의 팔달문, 사진 하중앙의 곧은 골목까지가 화성 성벽이 사라진 곳이다. 우측이 남문시장이다. |
ⓒ 이영천 |
이렇듯 사라지고 파괴된 성곽과 문화재가 제 모습으로 복원될 수 있었던 핵심에는 '화성성역의궤'라는 훌륭한 기록유산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훼손된 성곽과 그에 딸린 문루, 돈대, 공심돈 등은 이 기록을 토대로 1964년 복원을 시작 1975∼1979년 대부분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성 안 곳곳이 발굴과 복원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다.
이런 끊임없는 노력으로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유네스코에서 정한 규정과 세부 지침에 따라 보존·관리되고 있다. 아울러 화성 전 영역과 각종 문화재가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성곽 안팎이 역사문화보호를 위해 문화재청과 협의한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에 따라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에 모든 건축과 개발 행위에 대해 엄격한 규제를 가하고 있다. 지구 단위 계획으로 세세한 건폐율과 용적률, 건축 높이를 제한하고 있다.
이런 사유로 성곽 안팎은 명암이 동시 교차하는 공간으로 남았다. 긴 시간 동안 진행된 슬럼화가 암(暗)이라면, 높은 빌딩과 아파트가 없는 옛 정취 물씬 풍기는 저밀도의 경관을 간직하고 있다는 건 분명 명(明)이다. 공간은 화성 영향력 아래,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지니고 지금도 변화하는 중이다.
적응해가는 공간
이렇듯 강력한 규제로 성 안팎은 낡아지고, 인구 유출로 침체기에 빠진다. 도시 확산으로 인구가 빠져나간 한편, 화성의 문화적 영향력은 광역화했다. 주거 형태도 변해 가구당 거주 수가 급감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공간 노후화로 연결되어, 낡아 갈 수밖에 없었다. 낡아 감은 지대(地代) 하락을 가져왔다.
지대가 낮아지자, 공간으로 새로운 기능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낡은 집을 활용한 카페라든지, 전혀 새로운 기능으로 공방(工房) 유입이 대표적이다. 이런 기능의 유입은 복고풍을 좇는 사람들 발길을 공간으로 끌어들였다. 잦아지는 발길만큼 공간의 문화기능은 커졌고, 이는 다시 공간을 변화시키는 순기능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재생 노력이 더해져 화성이라는 뛰어난 문화유산과 시너지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 한옥체험마을 남수동에 조성 중인 한옥체험마을. 1단계 공사가 막바지이고, 2단계 공사는 터파기가 진행 중임. |
ⓒ 이영천 |
창룡문 부근은 학교 여럿을 제외하면 남수동 뿐이다. 남수동은 진행 중이던 슬럼화가 멈추고 정갈해지기 시작했다. 수원시가 이곳에 2021년부터 한옥 체험 마을을 조성하면서 특화된 공간으로 탄생을 예비하고 있다.
▲ 북수동 벽화마을 도시재생으로 밝은 얼굴을 갖게된 북수동 벽화마을 중 한 곳. |
ⓒ 이영천 |
수원천과 정조로 사이 남북으로 긴 북수동은 예전 큰 우시장이었다. 화성 축조 때 동원된 소가 남긴 흔적이다. 수원천변 매향중학교 맞은편 우시장이, 일제 강점기 남문시장으로 옮겨간다. 오랜 기간 슬럼화하던 북수동은 도시재생사업의 하나로 벽화마을로 재탄생해 눈길을 끌고 있다.
▲ 행리단길 행궁 북쪽의 행리단길 중 한 거리. 잦아진 젊은이들 발걸음으로 공간도 한층 활기차고 젊어지고 있다. |
ⓒ 이영천 |
화서문 동쪽, 행리단길로 알려진 행궁 북쪽 공간엔 젊은이들 발길이 잦다. 카페 등이 특색있는 분위기를 연출하며 활력을 되찾고 있다. 이런 변화에 힘입어 독특한 건축물들이 들어서면서 공간 변화가 추동되고 있다. 화성에 가면 반드시 걸어봐야 하는 길로, 과거 슬럼화의 그늘을 벗어나 오감 만족 거리로 변화하는 중이다.
▲ 통닭거리 팔달문 북쪽, 수원천 변에 자리한, 수원 명물로 알려진 통닭거리. 여러 가게들이 모여 집적효과를 배가하는 공간으로 자라났다. |
ⓒ 이영천 |
팔달문 동북쪽은 수원 대표 먹거리로 떠오른 통닭 골목으로, 영화의 무대가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1970년 문을 연 원조부터 십수 가게가 통닭과 문화를 튀겨내고 있다. 큰 가마솥에서 튀기는 게 이곳의 전통으로, 프라이드와 양념통닭의 특이한 고소함이 일품이다. 여기에 가격도 저렴하다.
▲ 남창동 공방거리 공예품 위주 예술가들이 모여 들면서 특색있는 색깔을 내보이고 있는 공방거리. |
ⓒ 이영천 |
팔달문 서북쪽은 특색있는 공방 거리다. 임대료 부담이 덜한 남창동에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태어난 거리다. 특이한 간판과 건물 외관, 길거리 작업은 물론 다양한 활동 예술가들의 작품이 수시로 전시된다. 거리를 찾는 사람을 위해 나무, 한지, 리본, 규방, 금속공예 등 다양한 체험과 공예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규제 완화만이 답일까?
그러함에도 강력한 규제는 시민의 재산권에 엄청난 제약일 수밖에 없다. 이에 수원시가 화성 안팎의 규제 축소에 나서나 보다. 숭례문과 전주 풍남문 사례를 들어 규제 반경을 500m에서 200m로 줄이려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그 사이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점·선·면 중 남대문이나 풍남문이 점(點) 시설이라면, 화성은 면(面) 시설이라 할 수 있다. 둘 차이는 언뜻 작아 보이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화성처럼 면적이 넓은 시설을 기준으로 끝단에서부터 해제한다면, 해제되는 면적에서도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 1924년 수원 지도 1백여 년 전의 수원시가지 지도. 화성 내부와 우측 팔달문 밖에 조성된 시가지를 볼 수 있음. |
ⓒ 서울역사박물관 |
낡았으면 낡은 대로, 세금과 개축 비용 지원을 통해 더 잘 보존할 방법을 찾는 건 어떤가? 오히려 도시의 옛 모습을 더 잘 간직하게 함으로써, 미래 공간으로 남겨 두는 건 어떤가? 고도화한 문화자원으로 더 큰 가치를 창출해낼 가능성이 충분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전주 '한옥마을' 사례에서 답을 찾아볼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장기적인 계획으로 성 안팎 규제지역에서 신·개축하는 모든 건축물을 한옥으로 유도하는 방안을 생각해 본다. 수원은 화성이라는 뛰어난 문화유산을 품은 곳이 아니던가. 세제와 건립비 지원 등을 통해 성 안에 한옥을 늘려간다면, 수원도 또 하나의 명물이 될 것이 자명해 보인다.
품위 있는 한옥이 연이어 선 고풍스러운 거리를 상상해본다. 활기찬 모습으로 그 길을 누빌 해맑은 얼굴들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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