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X파일]"형이 왜 거기서 나와…" 의외의 선거 맞대결

류정민 2023. 7. 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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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이런 조합의 국회의원 선거도 있었다
박지원 1996년 부천에서 김문수 상대
정동영 2008년 동작에서 정몽준 상대

편집자주 - ‘정치X파일’은 한국 정치의 선거 결과와 사건·사고에 기록된 ‘역대급 사연’을 전하는 연재 기획물입니다.

정치인은 누구나 성장 과정에서 고비를 경험한다. 고비를 몇 차례 넘어섰다고 정치의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 입문부터 퇴임까지 꽃길만 걷다가 가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다수는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정치인에게 가장 큰 고비이자 기회는 누가 뭐래도 선거이다. 특히 국회의원 선거가 그렇다. 대통령 선거는 역사가 선택하는 소수에게만 도전의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국회의원 선거는 그렇지 않다.

지역구만 해도 제21대 총선을 기준으로 253개에 이른다. 한 지역구에 평균 4명씩 출마한다고 가정하면 대략 1000명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자 지역구 선거에 나선다. 중진 정치인들은 이른바 정치 텃밭에서 손쉽게 국회의원 배지를 얻을 것 같지만, 의외의 전장(戰場)에서 운명의 대결을 펼쳐야 할 때도 있다.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가 2020년 7월 27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 의원들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윤동주 기자 doso7@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호남, 특히 목포를 지역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이다. 실제로 목포 지역구에서만 3선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4선(전국구 의원 포함) 이력을 쌓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후광 효과를 토대로 호남에서 편안하게 선거에 임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치인 박지원이 처음으로 국회의원 지역구에 도전한 곳은 전남 목포가 아니라 경기도 부천이다. 제14대 총선에서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의원이 된 박지원 전 원장은 1996년 제15대 총선에 새정치국민회의 간판을 달고 부천 소사 지역구에 나섰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당시 박지원 후보와 맞대결을 펼친 신한국당 후보는 부천 소사의 전설인 정치인 김문수였다. 박지원 후보는 3만1786표(득표율 37.3%)를 얻었지만, 김문수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이 1월30일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3자 대결로 펼쳐진 당시 부천 소사 지역구 선거에서 김문수 후보는 39.2%(3만3446표) 득표율로 당선됐다. 정치인 김문수 vs 박지원의 총선 맞대결은 1996년 제15대 총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 정치인 김문수는 부천에서 경기도, 대구 그리고 서울로 정치 본거지를 옮겼으며, 정치인 박지원은 목포에 정착해 정치 이력을 쌓았다.

2015년 4·29 재보선 당시 서울 관악을 국회의원 선거도 의외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다. 당시 관악을은 새누리당 오신환 후보, 새정치민주연합 정태호 후보가 맞붙었던 선거다. 두 사람 모두 관악에서 정치를 이어온 인물이기 때문에 이들의 맞대결은 의외로 보기 어렵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2019년 8월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강진형 기자aymsdream@

당시 여의도 정가에서 관악 선거에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전주의 아들’ 로 불리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출마 때문이다. 전주에서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하며 정치인으로서 승승장구하던 정동영 전 장관은 무소속 후보로 관악에 도전했다.

관악구는 정동영 전 장관 모교인 서울대가 있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대학 시절을 제외한다면 정치적으로 연고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지역이다. 정동영 후보는 당시 1만5569표(20.2%)를 얻으며 선전했지만, 당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로 대선에 나왔던 정동영 전 장관의 정치적 위상을 고려한다면 출마 자체에 의의를 둘 수는 없었다. 관악구 도전의 실패는 정치적인 상처로 남았다.

정몽준 전 의원

사실 정치인 정동영의 서울 국회의원 도전은 처음이 아니었다. 2008년 제18대 총선 때는 서울 동작구을, 2012년 제19대 총선 때는 서울 강남구을 지역구에서 각각 통합민주당과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한 경험이 있다. 이름만 조금 다를 뿐 모두 현재의 더불어민주당 쪽 계열의 정당이다.

특히 2008년 총선은 여야의 대선 주자인 정몽준-정동영 맞대결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결과는 싱거웠다. 당시 정동영 후보는 41.5% 득표율에 머물면서 54.4%의 득표율을 올린 한나라당 정몽준 후보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울산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해오던 정몽준 후보는 2008년 총선을 계기로 서울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지만, 정동영 후보는 결국 서울에서 국회의원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016년 다시 정치적 고향인 전주로 돌아가 국회의원이 됐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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