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한국영화엔 최민식이 있었다
[하성태 기자]
▲ 최민식 배우가 30일 오후 부천 현대백화점 중동점에서 열린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배우 특별전' 기자회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쉬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대를 열었다. <올드보이>도 최초일 것이다. 칸 국제영화제를 거쳐 한국영화를 전 세계 관객들에게 알렸다. 앞서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의 장승업으로 레드카펫을 밟았던 바로 그 칸이었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의 서막을 연 오대수는 '욘사마'와 함께 그 시절 1세대 한류의 대표 캐릭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친절한 금자씨>에선 유괴범, <악마를 보았다>에선 연쇄 살인마를 연기했다.
2010년대 이순신을 스크린으로 소환했고, 역대 흥행 1위 기록은 언제 깨질지 요원해 보인다. <명량>의 관객 수는 1761만 명이다. <범죄와의 전쟁>은 "살아있네"라는 유행어와 숱한 패러디를 양산했다. 그리고 OTT의 시대, 디즈니플러스의 한국 콘텐츠 최대 화제작 <카지노>로 건재를 과시했다.
그렇다. 배우의 배우 최민식이다. 한국영화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 중 하나이자 위기의 순간에 마이크를 잡고 앞장을 섰던 것도 최민식이었다. 50대를 넘어서면서는 한 눈 팔지 않고 연기에만 매진했다. 데뷔작 1989년 드라마 <야망의 세월> 속 '꾸숑'으로 요즘 아이돌급 인기를 얻고, 1990년대 캐릭터를 확 바꾼 <서울의 달> 춘식이로 사랑받았던 그는 글로벌 OTT TV쇼로 복귀하기 전까지 25년 간 영화에만 몰두했다.
지난달 29일 개막한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가 바로 그 최민식 특별전을 마련했다. 제목은 '최민식을 보았다'. BIFAN이 정우성·전도연·김혜수·설경구에 이어 5번째로 준비한 배우 특별전이다.
한국영화가 위기다. 최민식이 직접 골랐다는 영화들의 면면을 확인하며 부지불식 한국영화의 결정적 장면들에 최민식이 존재했다는 자각에 다다랐다. 중흥과 영광, 위기를 돌고 돌아온, 이제는 글로벌 OTT 시대와 극장의 위기를 맞은 한국영화를 꿋꿋이 지켜왔던 최민식. 문득 혈기왕성했던 40대 최민식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광과 위기
"이제 더 이상 이 훈장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2006년 2월, 최민식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광화문에 울러 퍼졌다. 영상을 통해 전국민에게 전달됐다. 당시 최민식은 <올드보이>를 통해 문화관광부로부터 받은 옥관문화훈장을 반납하겠다고 나섰다. 언론이 주목했다. 스크린쿼터 축소를 반대하고 문화주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투쟁의 일환이었다.
시대가 그랬다. 전 영화계가 나섰다. 최민식과 송강호, 안성기 등을 비롯한 충무로 배우들이 동참했다. 이들의 스크린 축소 반대 투쟁은 한미FTA 반대 및 농민들의 쌀투쟁과 함께 시대의화두이자 거대한 흐름이라 할만 했다. 이후 정부와 정치인들의 선택과는 별개로 영화인들의 문화주권 수호 투쟁은 한국영화 산업의 토대를 지탱하는 구심점이 됐다.
이후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가 열어젖힌 천만 관객 시대가 지속됐다. 갈수록 멀티플렉스 극장이 늘어났다. 최민식의 <명량>이 그 정점을 찍었다. 드라마도 대기업을 중심으로 3대 방송사 위주에서 분산화, 산업화, 장르화 됐다. 대중들의 눈높이가 올라갔다.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졌다.
아시아를 넘어선 작금의 K-콘텐츠를 향한 전 세계인들의 환호는 일정정도는 이러한 산업화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당시 일각의 반대 목소리에서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버팀목이 되줬던 스크린쿼터 반대 투쟁으로 문화주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영화인들의 노력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최민식은 이후 4년 간 일을 쉬었다. 최민식이 대중과 거리를 둔 유일한 휴지기었다.
자의반 타의반이었리라. 2005년 <쉬리>와 <넘버3>의 동료 송강호와 관련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그는 "00일보 기자 왔느냐"며 논쟁을 벌였고,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는 언론을 향해 질타를 날렸다. 투쟁의 선두에 서며 농민들 앞에서 큰 절을 올리던 최민식은 휴지기를 갖다 2008년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 캐스팅 소식을 알렸다. 당시 그의 복귀를 응원하며 영화매체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최민식이 잠잠했던 건 농을 섞자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한미 FTA와 스크린쿼터 투쟁의 일선에 나선 그에게 대중은 냉혹했다. <올드보이>를 통해 국민 배우의 자리에 우뚝 올라섰던 시간은 부지불식간에 '어제의 영광'이 되어버렸다.'
황정민은 '무릎팍도사'에 나와 말했다. "배우 나부랭이가 할 일이 뭐있겠냐. 진실한 연기를 하는 거 밖에" 하지만 대중들에게 최민식은 배우가 지켜야할 선을 넘은 것으로 인식됐다. '쌀투쟁' 집회에서 농민들에게 사죄의 절을 하고,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구호를 외치고, 각종 매체와 이론가로서 한미FTA와 스크린쿼터 철폐의 부당함을 역설한 것이 그의 '활동' 이력 전부다. 그 결과는 캐스팅 1순위, 연기파의 대명사였던 배우에 대한 철저한 망각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참여정부는 수명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고, 스크린쿼터는 관객들의 머릿속에 배부른 영화인들이 못 만든 영화를 구제하기 위해 내놓는 핑계거리로 전락했으며, (최민식은) 단 한 번의 광고 출연으로 '사채 광고를 찍은 국민배우'로 전락해 버렸다.' (2008년 2월 <무비스트>, <[환영] 최민식의 복귀를 바라보며 든 단상>)
이런 대중의 질타를 최민식은 연기를 통해 극적 반전을 이뤄냈다. 그야말로 드라마였다. 그는 2010년 <악마를 보았다> 속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를 통해 상업영화로 복귀했다. 파격적이었다. 이어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로>로 홈런을 쳤다. 공무원 출신 반달의 인생 역장은 확실히 최민식만이 할 수 있는 연기였다. <신세계> 속 느와르 세계도 최민식의 중후함이 뒷받침됐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명량>이 왔다. 전 국민적 위인인 성웅 이순신의 고뇌를 연기하는 최민식은 숱한 관객들의 눈물을 이끌어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던 2000년대를 감안하면 세월호 참사 직후 개봉한 <명량>에서 이순신을 연기하며 국민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으리란 걸 최민식 본인은 짐작이나 했을까. 그 자체로 '영화'롭지 아니한가. 최민식은 그렇게 배우는 연기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스스로 역설한 배우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배우의 배우 최민식의 꿈
"제 정치적 견해나 사회 이슈 관련 생각은 앞으로 작품으로 표현하겠다는 말로 대신 답변하겠다."
지난달 30일 특별전 기자 간담회 자리. 최민식은 남은 배우 인생에서 소명의식을 묻는 말에 이런 짧은 답변을 남겼다고 한다(관련 기사 : <최민식 "연기는 숨 쉬는 것 자체, 마음 식으면 미련 없이 떠날 것">). 본인 표현으로 "6학년"(60대)을 넘긴, 영화인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이의 통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어진 메가토크에 참석한 최민식은 연기라는 천직에 대해선 이렇게 표현했다.
"제가 안 변한 건, 제 일인 연기를 좋아서 하는 거다. 호구지책으로, 의무적으로, 직업은 직업인데 마지못해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언젠가 의무적으로 한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그만 둘 거다. 제 청춘을 다 바쳤기 때문에 구질구질하게 하고 싶진 않고. (연기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그래서 전 행복한 놈인 거 같다. 너무 좋은 분들이 많았고, 이 자리를 빌어서 너무 감사한 일이다."
그가 청춘을 다 바친 연기를 회고할 수 있는 특별전은 국내에선 BIFAN이 처음이다. 해외에서만 두 번 열렸다고 한다. 시기적으로 늦은감이 있기보다 장르를 떠나 '판타스틱'이란 수사보다는 리얼리즘이나 정극에 더 어울리는 최민식의 연기 세계를 반추하게 된다. 상영작의 면면이 그러하다. 회고전의 성격을 감안해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후배들을 받쳐주고 아우르는, 연기 선배이자 인생 선배의 진심어린 조언으로 다가온다고 할까.
토크 자리도 그랬다. 최민식은 중간 중간 <카지노>의 강윤성 감독, 이동휘, 홍기준 배우,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박동훈 감독, 신작 <파묘>를 작업한 <검은사제들>, <사바하> 장재현 감독 등 객석에 앉은 후배들을 일일이 소개했고, 배장수 부집행위원장, 모은영 프로그래머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심사숙고했다는 상영작 10편에 대한 소회를 밝히면서도 특유의 '인간미'를 잃지 않으면서 '배우'로서의 철학을 견지하고 있었다. 선배 배우이자 6학년 최민식으로서 말이다.
"예전엔 수다가 이렇게 수다가 많지 않았다"는 에피소드 자체도 흥미진진했다. <쉬리> 촬영 전엔 탈북 남파 공작원을 실제 만났다. "북한군 이미지로 고착될까" 거절했다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뒤로하고 캐스팅된 <파이란>은 장백지와 만나는 장면이 적어 "아주 불만 가득한 멜로"였단다. 파이란의 편지를 읽던 마지막 방파제 장면 촬영에선 따로 감독과 설정을 정하지 않았기에 "눈물이 날지 몰랐다. 담담할 수도 있고, 편지를 던질 수도 있고. 어떤 게 나올지 저도 궁금했는데 통곡이 나오더라"고 했다.
"원작 만화가 재미없었다"던 <올드보이>는 "박찬욱이라는 거장과 영화라는 매체의 자유로움 속에서 뛰어 놀았"다. <천문>은 허진호 감독이 최민식과 한석규에게 세종대왕과 장영실 중 역할을 본인들에게 결정하라고 했단다. 최민식은 1년 후배 한석규에게 "세종 또 하고 싶어? 할래?"라고 물었고, <뿌리 깊은 나무>와는 다른 세종을 보여주겠다는 한석규의 말에 덜컥 장영실을 덜컥 연기하게 됐다. 이후 장영실이 어떤 인물인지 공부하는 시간은 덤이었고.
술 얘기가 빠지지 않은 최민식표 입담이 이어진다. 연기는 결국 상상의 산물이다. 사랑이란 감정이 아직 잘 모르겠다. 이순재, 신구 선생님처럼 연기하려면 "운동도 하고 술도 줄여야" 할 것 같다. 데뷔작 <구로아리랑>에 관한 일화는 최민식이 만들어낸 캐릭터들의 인간미가 어디서 연원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박종원 감독도 데뷔작이라 잊히지 않는데, 그때 당시 150만 원 출연료가 엄청 큰 돈이었다(웃음). 영화의 사회적 기능, 사회의 아픈 부분을 이렇게 영화로 통렬하게 디테일하게 절실하게 지적하고 사람들한테 호소할 수 있구나. 그전까지 하더라도 연극만 하고 살았고 영화는 하나의 게임같은 오락 매체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우리 처한 현실의 얘기를 하는구나. 그때 많은 공부를 했던 거 같다. 돈 150만원에 혹했다가 많은 공부를 했지."
한국영화에 최민식이 있었다. 누구는 천변만화의 연기를, 또 다른 이는 메소드 연기의 장인이라 평한다. 부인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9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BIFAN 특별전을 계기로 다시 본 최민식. 그는 한국영화 그 자체다. 이른바 K-정서를 대변하는. 토크 말미 그가 관객에게 물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최민식도, 한국영화도 오래도록 관객들과 함께 할 것이다.
"가끔 그런 얘기를 한다. (한석규) 너하고 나하고 형하고 나하고 이십대 초에 만나서, 한명은 6학년 넘었고 한명은 곧 넘고. 이제까지 한 동네에서 연기하는 걸 보면 짠하기도 하고. 우리가 계속 연기할 지 안 할지 모르겠지만 신구, 이순재 선생님 나이가 돼서 그때도 연기를 하면 남다를 거 같다. 친구이자 동료로서 우리가 한 번 해 보자. (관객들을 향해) 같이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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