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했는데 지구 종말이라니... 당신의 선택은?
[조영준 기자]
▲ 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지구 종말 vs. 사랑>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01.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윤진(정의진 분)과 해경(김현목 분)은 한 조가 되어 한 편의 글을 함께 쓰게 된다. 문제는 조별 과제가 제출되기 전날 해경이 윤진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윤진은 그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제의 목적은 나로 가득 찬 세상에 타인을 초대하는 경험을 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하필이면 같은 조가 되어버린 두 사람. 이미 그 초대에 실패했고, 또 응하지 못한 이들에게 이 과제를 위한 경험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것은 '저 윤진 씨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라는 아주 간단하고 짧은 문장일 뿐이지만, 어떤 문장은 세상에 나와 공기와 맞닿는 순간 아주 크게 부풀어 상대를 밀어내기도 한다.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을 사이에 두고 저울은 어느 쪽의 편을 들어주게 될까. 전수빈 감독은 이 영화의 시작점에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를 대신하는 소재로 지구 종말과 사랑을 배치한 셈이다. 두 대상이 서로 화합하거나 어울릴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뉘앙스는 타이틀에서부터 엿보인다. 'VS', versus라는 단어는 양쪽에 위치한 두 무언가가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사용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사랑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마주하게 된 두 사람이 각자가 손에 쥔 가치의 무게를 맞대며 나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다툼과 화해, 이해와 조율의 시간이 놓일 것이다.
02.
과제를 위해 마주 앉은 두 사람. 어제의 불편한 감정을 제하더라도 두 사람의 대화는 순탄하지 않다. 지구 종말을 글의 소재로 쓰고 싶다는 여자와 사랑의 속성과 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남자. 상대가 원하는 소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도 명확하다. 윤진은 해경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 흔하고 뻔한 데다 이제 곧 종말이 다가오는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이냐 싶고, 반대로 해경은 윤진의 지구 종말이 더 창의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여자의 말대로 사랑이 그렇게 진부한 것이라면 세상의 많은 이야기가 사랑을 소재로 할 이유가 없을 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남자의 생각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이어졌던 남자의 고백은 두 사람의 대립을 조금 더 불편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사랑의 실현에 실패한 사람이 말하는 사랑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행위로 인한 현재의 의도에 대한 오염이라고나 할까. 더구나 상대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대상이니 그 정도는 더 심하다. 남자는 소재로서의 사랑을 말할 때마다 여자의 눈치를 보게 되고, 여자는 남자가 소재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마다 약간의 의심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30분이라면 짧을 수 있는, 어쩌면 그 안에서 평범한 채로 머물러 있게 될지도 몰랐을 두 남녀의 대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감독의 유효한 선택이다.
▲ 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지구 종말 vs. 사랑>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지구가 망해가는 마당에 진부한 사랑이야기나 쓰겠다고 하니까 윤진 씨 눈에 제가 얼마나 한심해 보일지 잘 알겠습니다."
해경의 자학적인 심경이 담긴 대사와 함께 과제를 마치지도 못하고 헤어지게 된 두 사람은 다음 날 수업 시간에 협의가 되지 못한 상태로 발표를 하게 된다. 서로 너무 다른 주제와 이틀에 걸친 불편한 감정 사이. 얼떨결에 선택된 것은 심지어 수업 시간에 지각까지 한 해경의 글이다. 상대인 윤진조차 처음 듣는 그의 글. 자신에게 사랑을 고하던 사람이 말하는 사랑에 대한 글. 자신이 한심하다며 자책하며 자리를 먼저 떠났던 사람의 글. 어떤 믿음도 가질 수 없는 글 앞에서 윤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단 하나뿐이다. '이 자리에서 진짜 공개 고백 같은 거 하지 마요.'
▲ 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지구 종말 vs. 사랑>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만 들여다보는 작품이 아니기에 깊이에 대한 아쉬움이 다소 남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의 마지막 3분에 놓인 해경의 글을 읽고 들으며 영화의 시간을 함께 다시 걷는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말과는 달리 윤진과 해경 두 사람의 사소하면서도 어설픈 배려와 태도를 바라보는 것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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