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미남 3000명 거느린 女쇼군…오오쿠의 도발, 일본 홀렸다 [도쿄B화]
■ 이영희의 [도쿄B화]
「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일본. [도쿄B화]는 사건사고ㆍ문화콘텐트 등 색다른 렌즈로 일본의 뒷모습을 비추어보는 중앙일보 도쿄특파원의 연재물입니다.
」
"때는 1630년 에도(江戸) 막부 3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 시대, 일본 땅에 신종 전염병인 '적면포창(赤面疱瘡)'이 퍼져나간다. 젊은 남자들만 감염되며, 한번 걸리면 며칠 안에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병. 치료법을 찾지 못해 남성 인구는 여성의 4분의 1까지 줄어들고 사회 구조는 변화한다. 살아남은 남자들은 '씨를 잇는' 소중한 존재로 다뤄져 노동에서 배제되고 여성들이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대부분의 가업은 여성에서 여성으로 계승된다. 결국 쇼군가(家)에도 병마가 들이닥치고, 막부는 어쩔 수 없이 여성 쇼군으로 대를 잇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넷플릭스가 6월 29일부터 일본과 유럽 등에서 방영을 시작한 애니메이션 '오오쿠(大奥)'는 이런 가상의 일본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한국은 공개일 미정) 일본 작가 요시나가 후미(よしながふみ)의 만화가 원작으로, 19권으로 완결돼 누적 발행부수 600만 부를 돌파한 인기작이죠. '오오쿠'는 실제 에도 시대, 정실과 측실, 시녀 등 쇼군만을 위한 여성 1000여명이 모여 살던 '금남(禁男)의 공간'이었습니다. 여성이 쇼군에 오르자, 오오쿠는 이제 후대를 잇는 임무를 띤 꽃미남 3000명이 모인 남자들의 세계로 변모합니다.
'오오쿠'는 올해 초 일본 NHK에서 드라마로 방영됐을 당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그것도 정통 사극의 전당인 공영방송 NHK가 이처럼 '도발적인' 내용의 픽션을 방영해도 되겠냐는 이야기가 나왔죠.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드라마는 대성공을 거뒀고, 올해 가을 시즌2 방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시즌 1에서 여성 쇼군이 등장한 배경과 '남자 오오쿠'의 탄생, 적면포창이라는 희대의 병마를 퇴치하려는 막부의 노력이 그려진 데 이어 시즌2에선 막부가 통치권을 일왕에게 반납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까지의 이야기가 다뤄진다고 합니다. 여성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도 등장할 예정이라 벌써 기대를 모으고 있죠. 이 가운데 넷플릭스가 처음으로 애니메이션까지 제작·방영하면서 '오오쿠 열풍'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사우디보다 낮은 日여성의 정치적 지위
'남녀역전(逆轉)'의 상상력에 일본인들이 빠져드는 데는 역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은 주요 7개국(G7)에 이름을 올린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턱없이 낮은 것으로 여러 통계에서 드러나고 있죠. 지난 6월 20일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성 격차 지수(젠더 갭 지수)'에서 일본은 조사 대상인 146개국 중 125위였습니다. G7 중 가장 낮은 것은 물론이고, 한국(105위)이나 중국(107위)보다도 아래였습니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 성별 격차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일본은 138위로 사우디아라비아(131위)보다도 낮은 순위였고 일본 아래에는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이 있었습니다. 실제 일본 중의원(하원)에서 여성 의원의 비율은 10%에 불과하고(한국은 19%) 현 내각의 여성 장관은 2명뿐입니다. 여성 총리도 아직 나온 적이 없죠. 집권 자민당이 부랴부랴 현재 11.8%인 자민당 여성 의원 비율을 10년 내 30%까지 올리겠다고 발표했는데 '10년이라니 너무 안이한 목표 아닌가'라는 비판만 받았습니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각부 통계에 따르면 작년 7월 말 기준 일본 최상위 상장기업 가운데 여성 임원 비율이 30%를 넘는 곳은 2.2%에 그쳤고,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는 곳도 18.7%였습니다. 이에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6월 13일 각의(국무회의)에서 2030년까지 대기업 여성 임원 비율을 30%로 늘린다는 목표를 명기한 정부 방침을 결정했습니다. 남녀 간 임금 격차 정보를 공개해야하는 기업의 규모도 상시 고용 직원 300인 초과에서 100인 초과 기업까지 넓히기로 했죠.
"여성이 정치해도 특별히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여성 쇼군이 다스리는 세상을 그린 '오오쿠'가 갖는 의미는 큽니다. 이 작품에는 쇼군이 여성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특별한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쇼군임에도 임신과 출산 때문에 고민한다거나, 에도 막부가 '쇄국 정책'을 취한 것은 여성 쇼군의 존재를 외국에 비밀로 하기 위해서라는 설정 등입니다. 그러나 일부를 제외하고는 당시 일어났던 사건들을 비교적 충실히 그리고 있어 '역사극'으로도 손색이 없다는 평을 받습니다.
'보아라, 여성이 쇼군에 오르니 이상적인 세상이 찾아오지 않는가'라는 식의 통쾌한 서사도 아닙니다. 여성 쇼군도 누군가는 한없이 잔혹하고 누군가는 낮은 자세로 백성을 섬깁니다. 어떤 쇼군은 오오쿠의 남자들을 끝없이 탐하고, 또 다른 쇼군은 좀처럼 남자에 관심이 없죠. 쇼군 자리를 둘러싼 권력 싸움은 치열하고 오오쿠의 남자들은 쇼군의 사랑을 받고 싶어 질투하고 음모를 꾸밉니다.
여자와 남자의 지위가 바뀌어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가상의 서사를 통해 이를 보여줌으로써 이야기는 설득력을 가집니다. 원작자인 요시나가 후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죠. "그저 여자들이 '당연하게' 일하는 세상을 그리고 싶었다"고요.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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