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왜 대한민국에는 이렇게 멋진 여자들이 많을까?
대한민국 여자들 멋있다!
“아가씨 아니고 형사입니다.” 넷플릭스 서바이벌 예능 〈사이렌: 불의 섬〉(이하 〈사이렌〉)에 출연한 경찰 이슬 님의 말이다. 〈사이렌〉은 경찰, 소방관, 스턴트맨, 경호원, 군인, 운동선수가 각각 팀을 이뤄 섬에서 각자의 기지를 발휘해 서로의 기지를 노리는 프로그램이다. 참여한 팀원들은 전원 여성이다. ‘여성’ 소방관, ‘여성’ 경호원 등으로 불렸던 이들이 계급장은 달되 여성이라는 꼬리표는 뗀 채 각 직군의 자존심을 걸고 맞붙는다.
우리가 이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간 미디어가 여성 캐릭터를 소비하는 방식에서 느껴온 피로감을 소거하고 완전히 열광할 자유를 얻은 것이 가장 달콤했다. 늘 남성이 다수인 출연진 중 어쩌다 선망하던 여성 유명인이 포함되면 그거라도 감지덕지라며 기뻐하면서도 혹시 그의 외모만 언급될까, 러브라인의 재료로 쓰일까, 똑똑하고 강인하면 드센 여자가 되고 멍청하면 백치미라는 이름으로 조롱당할까 늘 마음 졸였다. 무엇보다 그의 빛나는 재능과 입체적인 자아를 외면한 채 ‘여성’이라는 이름만으로 불리는 것이 마치 70분으로 축약해 TV로 전시된 내 현실 같아 쓰라렸다.
현장에 나가면 남성 형사에게는 형사님이라면서 여성 형사는 ‘아가씨’라고 부른다는 출연자의 말은 과장이 아닐 테다. 어디 경찰뿐일까? 식당에만 가도 여성은 여성으로만 호명되기 일쑤다. 카운터에 앉은 남성은 사장님으로, 주방에 있는 남성은 셰프라 불린다. 그러나 30년간 한식 요리를 펼쳐낸 여성 셰프의 전문성은 이모 혹은 어머님이라는 이름 앞에 지워진다. 가족 내에서 여성의 노동과 전문성을 그렇게 취급했듯, 여성 인력을 그렇게 호명하는 환경은 그의 능력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취급하고 좀처럼 권위를 내어주지 않는다. 사회가 직업을 가진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은 오랫동안 기만적이었다. 심지어 ‘직업여성’이라는 기괴한 단어는 ‘직업’으로 ‘여성’성을 판매하는 사람을 지칭하며, 〈표준국어대사전〉마저 유사한 설명으로 등재돼 있다.
그래서일까? 〈사이렌〉에서 단 한 명도 누구의 아내로, 딸로, 엄마로 소개되지 않은 이 여성들을 철저히 직업인으로 볼 수 있었던 해방감이 이 시리즈에 기꺼이 시간을 헌납하게 만든다. 기 싸움, 시샘, 뒷담화로 쉽게 사용됐던 여성들의 관계도 대신 전문가 집단의 전략과 연대, 의리로 펼쳐놓았다.
〈사이렌〉에 보내는 뜨거운 응원은 영화 〈캡틴 마블〉의 등장에 보낸 그것과도 닮아 있다. 〈캡틴 마블〉이 처음 공개됐을 때, 그 흥행을 폄하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캡틴 마블이 너무 강한 캐릭터이며, 그런 캐릭터에 비하면 빌런이 약해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군인 출신으로 슈퍼파워까지 탑재한 캡틴 마블은 언제나 그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성 사수에 의해 계속해서 그 힘을 억제하고 통제하라고 교육받는다. 캡틴 마블의 클라이맥스이자 엔딩은 외부의 적을 크게 쳐부수는 순간이 아니라 늘 스스로 검열하고 의심하도록 세뇌하던 대상에게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 없어(I have nothing to prove you)!”라고 선언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많은 여성이 자신의 분야에서 일에 집중하는 대신 자신에 대한 평가와 싸우고 존재를 승인받느라 에너지를 소진한다. 감정적이라고 할까 봐 필요한 순간에 분노하지 못하고, 남성보다 충성도가 낮다고 할까 봐 부당한 야근이나 회식을 견디고, 동시에 전형적인 여성성의 수행도 강요받는다. 그러고 집에 들어와 TV를 켰을 때도 같은 세계가 펼쳐지면 석양과 함께 마음이 진다.
그렇게 살아오던 일상에서 나타난 전문가들이 ‘남성 못지않은’이라든가 ‘여자치고 훌륭한’ 같은 수식어가 비집을 틈조차 주지 않고 불을 피우고, 끄고, 기지를 점령하고, 갯벌을 질주하는 모습에서 마음이 놓이고 또 요동치는 경험을 하는 건 자연스럽다. 직업인 그 자체인 채로 분투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에게도 그런 세상이 열릴 것 같아, 목구멍 어딘가에 매달린 뜨거운 마음을 삼키면서 보고 또 보게 된다. 직업 앞에 지루하게 붙는 여성이라는 수식어에 결코 집어삼켜지지 않는 존재들을 응원한다. 패자부활전이 끝나고 참가자들이 어깨를 걸고 외쳤던 말을 후창하며. “대한민국 여자들 멋있다!”
곽민지
다양한 비혼자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예능 팟캐스트 〈비혼세〉 진행자이자 출판 레이블 ‘아말페’ 대표. 〈걸어서 환장 속으로〉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를 썼다. 여성의 몸과 사랑, 관계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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