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마지막 문방구 지키려고... 사장님이 팔기 시작한 물건
[월간 옥이네]
학교 앞 문방구를 지나면 사탕으로 혓바닥을 빨갛고 파랗게 물들였던 때가 떠오른다. 등·하굣길에 사탕과 과자 진열대를 지나치지 못하고 주머니 속 동전을 털어 군것질 하나씩 집던 친구들, 입구에 놓여 있던 게임기 앞 응원에 훈수가 더해진 소리가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던 풍경. 문방구는 늘 북적였다.
하지만 요즘 문방구 풍경은 그때와 사뭇 다르다. 하굣길 즐거움이던 불량식품도, 동전 몇 개로 몇 시간을 놀던 오락기도 흔적을 감췄다. 문방구는 준비물을 사러 가는 곳이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부모님과 친구의 선물을 고민하고, 심심할 땐 그냥 들러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던 문방구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저마다의 기억 속에 자리할 유년 시절의 문방구를 떠올리며 충북 옥천의 문방구 3곳을 찾았다. 그때와 판매 품목도 모습도 사람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이웃을 위한 공간으로, 안부를 나누는 공간으로, 때로는 읍과 면을 이어주는 공간으로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문방구들이다.
▲ '화이트피노키노'는 청산면에서 유일하게 문구류를 살 수 있는 곳이다. |
ⓒ 월간 옥이네 |
▲ 24년째 화이트피노키노를 운영하는 박용수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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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초등학교(청산면 지전리) 정문을 따라 걷다 왼쪽으로 돌아가면 문방구가 보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간판이 하얗게 바랜 '화이트피노키노'는 청산면에서 유일하게 문구류를 살 수 있는 곳이다.
유일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옥천읍을 제외한 나머지 8개 면 지역의 마지막 문방구이기도 하다. 24년째 화이트피노키노를 운영하는 박용수(78)씨는 "우리가 기억하는 문방구 풍경은 앞으로 없을 것"이라며, 유일할 수밖에 없는 문방구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동군 황간면에서 나고 자란 박용수씨는 1999년 옥천군 청산면으로 이주했다. 그는 옥천으로 이주하기 전 곶감, 호두, 식용메뚜기를 판매했는데 대구에서 대리점을 운영할 만큼 사업이 번창했다. 특히 곶감은 떫은맛이 없기로 입소문이 나 재구매율이 높았다고.
"감은 천천히 자연 건조해야 해요. 그래야 찌지 않아요. 찐다는 것은 떫다는 말인데, 일찍 감을 따서 냉동실에 넣은 곶감에서는 떫은맛이 나요. 처음 맛볼 때는 몰라, 한 20~30분 지나고 보면 입술에 떫은맛이 묻어나요. 감을 맛보면서 입이 안 찌는 시기를 기다렸다가 감을 깎고 천천히 자연 건조 시키죠.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래야 맛있는 곶감을 먹을 수 있어요. 시간에 쫓겨 대충 팔면 다 티가 나는 법이지요. 그걸 손님들이 알아주더라고."
젊은 시절부터 맛 좋은 곶감을 만들던 박용수씨는 가족이 문방구를 시작하면서 함께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곶감을 만지는 일처럼 천천히 가족과 함께 할 방법을 생각했다. 충북 옥천과 경북 상주, 두 곳을 고민하다 학생과 감나무가 고루 있는 옥천군 청산면에서 1999년 화이트피노키노를 시작했다.
"처음에 청산에 왔을 때만 해도 초·중·고·유치원생까지 한 500명 됐죠. 문방구가 옆으로 두 집이 더 있을 만큼 학생이 많았어요. 청산면에 있는 문방구 중 우리 집이 제일 커서 학생이 많이 몰렸고요. 어느 정도였느냐면 물건을 훔쳐 가도 모를 만큼 사람들로 꽉 찼었죠."
그가 말한 '물건을 훔쳐 가도 모를' 상황은 종종 일어났다. 등교 시간이면 잊고 있던 준비물을 사기 위해, 친구와 만나기 위해, 어느 학교 할 것 없이 몰려오는 학생들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한바탕 학생들이 휩쓸고 지나가면 잠깐의 등교 시간이지만 정신이 쏙 빠졌다.
시끌벅적한 아침을 보내고 비어 있는 물건 정리와 재고 파악으로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이다 보면 금세 저녁이 되곤 했다. 그쯤 쭈뼛쭈뼛 문방구를 들어서는 학생이 더러 있었는데, 훔친 물건을 학교 선생님 혹은 부모님이 발견해 돌려주러 온 것이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기에 학생을 다독였던 일도 그리운 추억이 됐다.
화이트피노키노에는 여전히 식료품이 준비돼 있지만 지금은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문방구의 또 다른 묘미인 군것질거리다. 백 원짜리일지라도 매대에는 군에서 허가받은 식품만을 올렸을 정도로 철저한 기준을 갖고 운영한 코너였다. 수시로 재고 확인을 해야 할 정도로 순식간에 팔려나가는 인기품목이었지만 어린이 손님의 수가 줄어들면서 지금은 사라졌다.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물건을 들이면 큰일 나죠. 학생들이 주로 다녀가는 문방구는 특히요. 가격과 상관없이 어린이들이 먹을 건데 아무거나 둘 수 없죠."
곶감처럼 문방구에 들이는 간식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던 박용수씨는 간혹 '추억 속 문방구'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간식으로 문방구 한쪽을 꽉 채웠던 모습을 생각한다.
▲ 추억의 돼지저금통이 보인다. |
ⓒ 월간 옥이네 |
▲ 화이트 피노키오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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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문방구 화이트피노키노를 운영한 지 15년, 말로만 듣던 인구 감소를 체감하기 시작했고 곧 문방구 풍경도 달라졌다. 불티나게 팔리던 간식은 추억이 됐고, 필기도구·실내화 등 학용품은 드물게 판매되면서 재고가 쌓였다.
"한 15년 정도 하니까 계속 학생 수가 줄어서 문방구를 이어가기가 어려웠어요. 곶감을 같이 팔아도 세도 안 나오겠더라고요. 그래서 일반 제품을 들이기 시작했죠. 그렇게 하나, 둘 잡화 품목이 늘면서 문방구 모습이 달라졌어요."
박용수씨 말대로 화이트피노키노에 들어서면 모자, 신발, 식료품 등의 잡화류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구석구석 봐야지만 지난 문방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때 이곳의 주인공이었을 공책, 연필, 스티커는 한쪽으로 밀려난 모양새다.
"시험을 보러 간다며 연필 한두 자루 사 가는 학생, 공부하신다고 볼펜 한 자루씩 사 가시는 복지관 어르신들... 가끔이지만 필요하신 분이 계시니 못 없애고 있어요.
신발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3년 전 동네 신발 가게가 없어졌는데 주변에서 저더러 장화 장사를 하라더라고. 신발에 대해 아는 것 없이 장사를 시작했는데 장화 종류만 수십 가지인 것이, 이거 잘못 시작했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물건 찾는 사람은 있는데 판매하는 곳이 없어지니까. 우리 마을은 왜 자꾸 늙는 건가, 서글픈 생각에 밑져야 본전 아니겠냐는 마음으로 이웃이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 두는 거예요."
면 지역에 없어지는 것은 신발 가게만이 아니다. 생활에 필요한 것을 동네에서 찾지 못하고 몇십분을 달려 영동, 옥천읍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 조금이라도 줄었으면 한다는 박용수씨. 같은 마음으로 2년 전 화이트피노키노의 또 다른 간판을 만들었다. 노란 배경에 손수 적은 '만물상회', 가게 전면에 크게 붙은 두 번째 간판은 오래된 이웃을 다시 불러 모았다.
▲ 노란 배경에 손수 적은 '만물상회', 가게 전면에 크게 붙은 두 번째 간판은 오래된 이웃을 다시 불러 모았다. |
ⓒ 월간 옥이네 |
▲ "한 15년 정도 하니까 계속 학생 수가 줄어서 문방구를 이어가기가 어려웠어요. 곶감을 같이 팔아도 세도 안 나오겠더라고요. 그래서 일반 제품을 들이기 시작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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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도 두 번째 간판은 손님을 연이어 문방구 안으로 초대했다. 이곳이 없다면 번거롭게 차를 달려 나가야 하지만, 작더라도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만물상회 덕에 수고를 던 안도도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행복한 하루 보내시라"는 손님의 인사도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박용수씨는 두 번째 간판을 잘 만든 것 같다며 웃는다. 학생을 위한 공간에서 이웃을 위한 공간으로 '화이트피노키노'를 지켜가는 그는 문방구를 이어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은 곧 다짐이 되기도 한다.
"제가 마지막이죠. 이곳을 더 이상 이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청산면에 더 많은 것이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가 할 수 있을 때까지 할 거예요. 학생보다 어른들이 더 많이 오는 곳이 됐지만 이제는 어느 누가 와도 좋은 곳으로 남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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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최저가 시대에 학생들 사로잡은 가게 "우린 파는 게 달라요" https://omn.kr/24kob
월간옥이네 통권 72호(2023년 6월호)
글·사진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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