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황당한 공문"... 광주 교육청은 생각도 없나
[서부원 기자]
'모든 아이들이 꿈꾸는 미래가 현실이 되도록, 다양성, 책임, 미래, 공정, 상생의 가치를 담아 학생이 중심인 교육,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 모두가 주인 되는 교육을 만들겠습니다. 시민과 손잡고 교육 가족과 소통하며 모두가 함께 만드는 교육을 실현하겠습니다.'
광주광역시교육청 누리집에 내걸린 이정선 교육감의 다짐을 통해 교사들은 교육감의 교육 철학과 정책 방향을 읽을 수 있다.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할 수 없는 미래 우리 교육의 핵심 가치를 두루 담아 이따금 수업 시간 아이들에게도 소개하는 글이다.
그런데 지금껏 교육청이 보여주는 모습은 교육감의 다짐과는 사뭇 동떨어져 있다.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책임지는 모습도 없고 과거의 상명하달식 행정을 그대로 답습한다. 공정이라는 단어가 되레 현 정권에 발맞추기 위한 레토릭 아닐까 의심될 지경이다.
최근에 벌어진 두 가지 사례만 봐도 그렇다. 하나는 지금까지도 버벅대는 '4세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의 오류' 문제고, 다른 하나는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국민의 힘 조경태 국회의원 요구 자료 요청' 공문과 관련된 일이다. 둘 다 일선 학교 현장에 엄청난 고통과 충격을 준 사건이지만, 교육청의 분위기는 차분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하다.
▲ 조경태 국민의힘 의원이 11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선거제 개편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
ⓒ 남소연 |
교육부가 그 흔한 공청회와 시연조차 없이 우격다짐으로 일괄 도입할 때부터 교사들은 적잖이 불안해했다.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일지라도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어서다. 전교조나 실천교육교사모임 등 교육단체에서는 시스템의 전환에 신중할 것을 거듭 요청했다.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다른 항목도 아닌 평가 관련 영역에서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다. 출제 내용과 성취기준, 난이도와 배점, 정답이 적시된 '문항 정보표'가 다른 학교의 시스템에서 출력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직후 '4세대 NEIS'는 며칠 동안 먹통이었다.
학교마다 기말고사를 코앞에 둔 시점이어서, 파장은 엄청났다. 교육부는 서둘러 시험 기간 일정을 늦추거나 문항 번호와 답지를 변경하라는 긴급 공문을 띄웠다. '문항 정보표'의 유출은 교과에 따라 출제 내용이 공개됐다는 것이어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월요일에 기말고사가 시작되는 학교에서는 주말에도 교사들이 출근해 시험 문항을 재출제하고 수정하는 등 발을 동동 굴러야만 했다. 교육청이 한 건 교육부로부터 접수한 긴급 공문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일선 학교로 즉시 하달한 게 전부였다. 교육청이 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교육부 장관과 담당자에 공식 항의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더욱 황당한 건 긴급 공문을 발송한 며칠 뒤 교육부의 지침을 제대로 지켰는지 보고하라는 공문을 다시 학교에 보냈다는 점이다. 이 또한 교육부의 지시를 그대로 따른 것이겠지만, 얼마나 무례하고 무책임한 행태인지 깨닫지조차 못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교육청은 규정에 따라 처리했다는 답변만 되뇌고 있다.
'점입가경'이라고 해야 할까. 며칠 전 관내 모든 학교에 하달한 '국회의원 요구 자료 요청' 공문을 보고 있으면, 교육청의 존재 이유가 궁금해진다. 학교 도서관에 '현대 정치사 인물 관련 도서 보유 현황'을 보고하라는 내용인데, 단지 보유 여부에 따라 '○' 또는 '×'로만 표기하도록 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보고하라는 '국회의원 요구 자료'는 일선 교사들을 괴롭히는 '잡무'로 악명이 높다.
문제는 공문의 요구 사항이 자칫 오해를 살 소지가 다분한 데다, 학교 내에서조차 이념적 갈등을 부추길 수 있는 민감한 내용이라는 점이다. 제목엔 '현대 정치사 인물'이라고 해놓고선 특정 인물들을 적시해놨다. 역대 대통령들과 함께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손석희 전 JTBC 사장, 그리고 새마을운동과 세월호까지 등장한다.
당적을 갖고 시장직을 수행한 박원순까지는 그렇다 쳐도, 평생 언론인으로 살아간 손석희까지 범주 안에 끼워 넣는 건 당혹스럽다. 심지어 세월호 관련 도서까지 문제 삼는 건, 해당 국회의원실에서 요구 자료를 보낸 저의를 의심케 한다. 저들을 뭉뚱그려 좌파로 낙인찍고 학교가 좌경화됐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생각된다.
공문을 받아 든 도서관 사서 교사는 십수 년 근무하면서 가장 황당한 공문이라고 토로했다. 다른 교사들도 국가가 임의로 '불온서적'을 지정해 치도곤 하던 군사독재정권 시절이 떠오른다고 입을 모았다. 좌우나 진보, 보수의 정확한 기준이라도 제시한다면 모를까, 해당 국회의원실 입맛대로 분류한 것이어서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 도서관의 통계를 살펴봤다. 실제 관련 도서 보유 여부는 학교마다 차이가 있을지언정 대강 어슷비슷할 것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터 현 윤석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관련 도서가 비치돼 있지 않는 인물은 박근혜와 윤석열, 단 두 명이다. 둘 다 보수 정권으로 분류되니, 외견상 학교가 좌편향되어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을 듯하다.
▲ 28일 오전 국회 앞 이태원참사 단식 농성장에서 이태원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집중 공동행동의 날 행진을 마친 세월호 유가족 순범엄마 최지영씨가 9일째 단식 농성 중인 고 박가영씨 어머니 최선미씨와 함께 대화하고 있다. |
ⓒ 이희훈 |
그도 그럴 것이, '현대 정치사 인물' 뒤에 굳이 '대조군'으로 설정한 새마을운동과 세월호 참사의 관련 도서 보유 현황을 통해 짐작되는 게 있다. 현재 학교 도서관에 새마을운동 관련 도서는 없고, 세월호 참사 관련 도서는 있다. 이를 두고 새마을운동을 의도적으로 경시하는 처사라며 학교 도서관을 압수 수색할지도 모른다는 농담 아닌 농담마저 나돈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은 없고 세월호 참사가 있는 건 당장 '세월' 때문이다. 반세기도 더 지난 사건과 10년도 안 된 데다 온 국민의 가슴에 여전히 응어리가 남은 사건을 단순 비교하려는 건 억지다. 설마 새마을운동과 세월호 참사를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을 덧씌워 갈라치려는 걸까.
역대 대통령의 관련 도서 보유 현황도 단순 비교하는 건 난센스다. 권수로 치면 아직 박정희 대통령 관련 도서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관련 도서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출 현황만 봐도 현재와 가까운 인물 관련 도서일수록 많다.
이 황당한 '국회의원 요구 자료'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자료 해석으로 소모적 갈등을 일으킬 게 불 보듯 환하다. 그런 공문을 기한 내에 보고하라고 다그치며 학교로 내려보낸 교육청을 당최 이해할 수 없다. 전화를 걸어 항의했더니, 전가의 보도처럼 규정에 따라 처리했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교육청도 문제의식은 느끼지만 제지하거나 거부할 아무런 힘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과연 그럴까. 교육감도 엄연히 주민 투표로 당선된 선출직인데다, 명색이 지역 교육을 이끌고 책임지는 수장이다. 교육부든, 국회의원이든 부당한 요구에는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결기가 필요한 자리다.
교육부의 지시와 국회의원의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규정을 핑계 삼아 그 흔한 문제 제기조차 하지 못하는 교육청의 행태는 일선 교사들의 교육적 열정과 자존감마저 꺾이게 만든다. 이는 교육청이 교육부에 순응하듯, 일선 학교도 교육청에 복종하라는 메시지다. 책임을 면피하자면 순응과 복종만 한 게 없다.
교육청은 학교 교육을 행정적으로 지원하며, 교육의 질적 발전으로 위해 교육 공동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기관이다. 과연 지금 교육청은 그 역할에 충실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특히 최근의 무기력한 모습에서 교육청은 교육부와 국회의원의 '마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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