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홍련전'에서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
[김종성 기자]
▲ SBS <악귀>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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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악귀>에는 억울하게 죽은 이의 혼령이 나타나 자신의 사연을 알리거나 악당을 시원하게 응징해주는 장면들이 나온다. 학교폭력 피해자로 오인됐지만 실은 가정폭력 피해자였던 남학생의 혼령이 구산영(김태리 분)과 염해상(오정세 분)에게 나타나 진실을 알리고 여동생을 위기에서 구해준다.
구산영 모녀를 포함해 다수의 피해자를 양산한 보이스피싱 범인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는 죽기 직전에 수천만 원을 인출해 옥상에서 마구 뿌려댄 뒤 "제발제발 살려주세요"라며 스스로 목을 매단다. 경찰은 범행 현장에서 지문이 나온 구산영을 의심했지만, 구산영의 알리바이는 확실했다.
23일 방영된 <악귀> 제1회에서는 이 드라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고전소설이 언급됐다. 어린 시절의 구산영이 아버지 구강모(진선규 분)과 함께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장화홍련전>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있었다. 아버지는 동화책을 들고 "계모와 그 아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죗값을 받고, 장화와 홍련 두 자매의 귀신은 원통함을 풀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라고 읽어준다.
장화·홍련 자매는 계모와 이복형제한테 학대를 받다가 누명을 쓰고 죽은 뒤, 신임 사또 앞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한다. 하지만 놀란 신임 사또가 기절해 죽는 일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정동우라는 담대한 사또가 부임한 뒤에야 진상이 드러나고 계모와 이복형제는 사형을 받는다. 억울하게 죽은 장화·홍련이 원한을 푸는 내용이 이 드라마의 모티브 중 하나라는 것을 구산영 부녀의 대화는 보여준다.
<장화홍련전>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한을 푸는 이야기로 주목을 끌고 대대로 전승됐기 때문에, <악귀> 같은 현대물의 모티브로 충분히 활용될 만하다. 그런데 이 소설과 관련하여 제대로 조명되지 않는 것이 있다. 소설의 저변에 흐르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불합리가 그것이다.
<장화홍련전>에서 악인의 표상은 좌수 배무룡의 후처이자 장화·홍련의 계모인 허씨다. 허씨는 결혼을 앞둔 장화가 혼수품을 많이 싸들고 갈까봐 결혼을 방해한다. 장화가 불륜으로 임신한 뒤 중절을 한 것처럼 꾸민다.
<장화홍련전>은 허씨가 "제 자식 장쇠를 불러 큰 쥐 한 마리를 잡아오게 하였다"라며 "그러고는 그것의 껍질을 벗기고 피를 바른 형상을 만들어 가지고는 장화가 자는 방에 들어가 이불 밑에 넣고 나왔다"고 서술한다. 허씨는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란 남편의 동의를 얻은 뒤 장쇠를 시켜 장화를 연못에 빠트려 죽인다.
좌수는 지금으로 치면 지방의회 의장과 비슷했다. 수령 자문기관인 향청을 이끄는 위치였다. 이런 지역 유지의 미혼 딸이 임신 중절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향촌이 발칵 뒤집힐 것이므로, 장화를 죽이는 쪽으로 부부가 모의를 했던 것이다. 이런 내막을 나중에 알게 된 홍련도 장화가 빠진 연못에 스스로 뛰어들었다.
계모의 학대는 어느 정도는 친부의 묵인이나 방조를 전제로 한다. 친부가 내막을 전혀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책임이 조금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두 자매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단순히 묵인이나 방조를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허씨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허씨와 장쇠의 범행을 적극 지원하기까지 했다.
그는 한밤중에 두 딸을 집 밖 연못으로 유인하기 위해 "너의 외삼촌 집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잠간 다녀오라"고 명령했다. 뜻밖의 지시에 놀란 장화가 "소녀 오늘까지 문 밖을 나가본 일이 없는데, 부친은 어찌하여 이 깊은 밤에 알지 못하는 길을 가라 하시나이까?"라고 묻자, 배무룡은 크게 화를 내며 "장쇠를 데리고 가라 하였거늘 무슨 잔말을 하여 아비의 명을 거역하느냐?"라며 장화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런데도 배무룡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훈방 처분을 받는 데 그쳤을 뿐이다. 이 사건에 대해 한양의 임금은 '허씨의 죄상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며 이렇게 판결했다.
"흉녀의 죄상은 만만불측이니 흉녀는 능지처참하여 후일을 징계하며, 그 아들 장쇠는 목매어 죽이고, 장화 자매의 혼맥을 신원하여 비를 세워 표하여 주고, 제 아비는 방송(放送)하라."
▲ SBS <악귀>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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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불합리한 요소가 담긴 스토리가 대중의 호응을 받으며 후세에까지 전승됐다.조선시대 독자들이 불합리를 그냥 지나쳤건 저항감을 느꼈건 간에, 스토리 속에서 불합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권선징악이 주제인데도, 가장의 과오에 대해서는 '징악'이 이뤄지지 않았다. 가장을 면책하는 불합리가 자연스레 받아들여진 결과다.
이런 불합리는 스토리 구조가 비슷한 경남 밀양의 '아랑 전설'에도 나타난다. 관청 사환인 통인의 성폭력에 항거하다가 칼에 맞아 희생된 아랑의 불행에는 유모의 흉계도 크게 작용했다. 통인과 짜고 아랑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사람은 어릴 적부터 새어머니 역할을 해온 유모였다.
아랑의 아버지인 밀양부사는 참혹한 변이 일어난 사실을 모르고, 딸이 외간남자와 함께 도주했다고 믿고 벼슬을 사직했다. 그런 뒤에 부임한 신임 부사들은 <장화홍련전>의 사또들처럼 의문의 죽음을 연달아 당했다. 그러다가 이상사라는 담대한 부사의 부임을 계기로 <장화홍련전>과 비슷한 결말을 맺게 됐다.
<장화홍련전>의 아버지에 비해 아랑 전설의 아버지는 딸의 죽음에 대한 관여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하지만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딸과 유모의 관계를 주의 깊게 관찰하지 못해 딸의불행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다. 변을 당한 딸의 행방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장화홍련전>이나 아랑 전설은 가정에서 발생한 불상사의 책임을 가장이 아닌 계모나 유모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했다. 아버지들의 잘못이 분명히 있는데도, 계모나 유모의 죄악을 폭로하는 것으로 권선징악의 효과를 거두고자 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한을 푸는 내용을 담아 오늘날에도 두고두고 리메이크되는 <장화홍련전> 같은 문학작품은 귀신의 작용에 의해서도 해소되기 힘들었던 조선시대 가부장제의 막강하면서도 불합리한 힘을 저변에 깔고 있다. <악귀>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대사다. 귀신이나 악당보다 더 무서운 가장들의 절대적 권위를 <장화홍련전> 같은 데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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