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참사'... 한국 여자농구의 암울한 현 주소

이준목 2023. 7. 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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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농구 대표팀, 2024 파리올림픽 진출 실패

[이준목 기자]

한국 여자 농구가 ‘시드니 참사’를 겪으며 2024 파리올림픽 진출에 실패했다. 정선민 감독이 이끄는 한국 여자농구 대표팀은 지난 30일 호주 시드니올림픽파크에서 열린 2023 FIBA(국제농구연맹) 아시아컵 4강 진출 결정전에서 호주(세계 3위)에 64대 91, 27점차로 완패했다.

한국은 아시아컵 4강 진입이 좌절되면서 우승 실패와 더불어 상위 4팀까지 주어지는 파리올림픽 최종 예선 출전 자격마저 놓쳤다. 아직 필리핀과의 순위 결정전이 남아있지만, 이미 지금까지만으로도 한국 여자농구가 아시아컵에서 기록한 역대 최악의 성적을 경신했다.

한국은 1965년 전신인 아시아선수권(ABC) 시절부터 12회나 정상에 올라 대회 최다 우승국이다. 하지만 마지막 우승은 정선민 감독이 선수로 활약했던 15년전 홈에서 열린 2007년 인천 대회였다. 마지막으로 결승에 오른 것이 2013년 방콕 대회였고, 최근 4개 대회에서는 일본, 중국, 호주 등에 밀려 3-4-4-4위에 그쳤다. 그리고 이번 대회에서는 결국 사상 최초로 4강에도 오르지 못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정선민호의 현실적인 목표는 4강 진출로 최종예선 티켓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조별리그 A조에 속한 한국은 강호인 중국은 이기기 어렵더라도 뉴질랜드와 레바논을 잡아 2승으로 조 2위를 노린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1차전에서 세계랭킹 29위인 뉴질랜드에 덜미를 잡히며 계획이 꼬였다.

나머지 2경기를 모두 이겨야한다는 부담을 안게된 정선민 호는 최약체인 레바논에게만 낙승했을 뿐, 중국전에서는 나름 선전하고도 분패하며 결국 1승 2패로 조 3위까지 밀려났다. 중국과의 연장혈전으로 이기지도 못하고 체력만 소모한 가운데, 토너먼트에서는 강력한 우승후보인 호주를 일찍 만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겹쳤다.

결국 정선민호는 호주전에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농락당했다. 센터 박지수가 체력 문제로 17분간 출전하여 6득점에 그친 한국은 리바운드에서 23대 48로 두 배이상 압도당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양궁농구’도 3점슛을 14개를 시도하여 단 3개를 꽃아넣는데 그치며, 오히려 호주(7/16)에게 효율성에서 밀렸다.

한국 여자농구는 올림픽 무대에서 1984년 LA 대회 은메달, 2000년 시드니 대회 4강 등 출중한 경쟁력을 발휘하며 한국 구기종목의 자존심을 드높였다. 하지만 2008년 베이징 대회 8강을 끝으로 더 이상 한국 여자농구는 더 이상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1992 바르셀로나·2012 런던·2016 리우 올림픽에는 비록 본선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최종 예선까지는 진출했다. 2021년 도쿄 대회에서는 13년 만에 본선무대를 밟아 비록 3전 전패에 그쳤으나 강팀들을 상대로 선전하며 모처럼 한국 여자농구의 희망을 되살리는 듯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시드니 참사’로 인하여 한국 여자농구는 다시 암흑기를 걱정해야하는 처지에 몰렸다.

어쩌면 이번 대회를 계기로 그동안 누적되어 온 한국 여자농구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평가다. 1980년대에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국 여자농구는 박찬숙, 정은순, 정선민, 전주원, 변연하, 박정은 등 세계무대에서도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는 스타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농구에서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스타는 박지수 정도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여자농구는 국제무대에서 ‘박지수 원맨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WKBL 최고의 선수인 박지수는 지난해 공황장애와 부상 등으로 한 시즌을 거의 쉬다시피 했고, 이번 대회를 앞두고 대표팀에 복귀했지만 여전히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은 상태였다. 정선민 감독은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상 위험이 큰 박지수를 무리하게 기용할수 없었다. 대표팀의 유일한 190m대 장신빅맨인 박지수가 없는 한국의 골밑은, 공격도 수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세계무대는 커녕 아시아권에서도 경쟁팀들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강이슬, 김단비, 박지현 등 WKBL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들은 국제무대에서는 한계가 뚜렷했다. 물론 이들 역시 나름의 경쟁력을 갖춘 좋은 선수들이었지만 국제무대에서 황금세대로 꼽히던 선배들과의 차이는, 국제무대에서는 개인능력으로 경기흐름을 바꾸기보다는 준수한 2, 3인자로 ‘강팀의 퍼즐조각’에 더 어울리는 유형의 선수들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최근의 한국은 과거의 정선민이나 변연하처럼 경기흐름이 풀리지 않거나 중요한 클러치 상황에서 믿고 공을 맡길 수 있는 선수가 없다. 현재의 에이스인 박지수 역시 컨디션이 좋을 때도 1대 1에 능한 선수는 아니었다. 이러다보니 도쿄올림픽이나 지난 28일 중국전에서처럼 수비와 외곽슛으로 상대를 어느 정도 괴롭힐 수 있어도 타이트한 경기 상황에서 고비를 넘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반복된다.

그나마도 얇은 선수층으로 인한 높은 주전 의존도와 그에 비례하는 체력적 부담은 대표팀의 고질적인 문제다. 국제무대에서 빅맨진은 박지수의 대체자는 고사하고 잠깐의 휴식시간을 보장해줄 백업 멤버도 마땅치않다. 포워드진도 어느덧 30줄을 넘긴 김단비와 강이슬을 대체할 선수가 없다보니 부진하거나 체력이 떨어져도 교체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정선민 감독은 수비 매치업의 문제 때문에 공격과 게임조립을 어느 정도 포기하면서 그나마 신장이 큰 선수들을 기용하여 수비에 올인하는 변칙적인 경기운영을 시도해야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코칭스태프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정선민 감독은 한국 여자농구의 최고 레전드이지만 지도자로서는 코치직만 경험했을뿐 감독직은 국가대표팀이 최초였다. 이는 전임자였던 전주원 감독(우리은행 코치)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주원 감독은 올림픽에서 그나마 강팀들을 상대로 내용 면에서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결과는 어쨌든 3패였다.

전주원 감독의 뒤를 이어 2021년부터 여자농구대표팀의 지휘봉을 정선민 감독은 지난 2년간 냉정히 말해 보여준 것이 없었다. 첫 대회였던 2021년 암만 아시아컵에서 4위에 그쳤고, 2022년 FIBA 농구월드컵에서는 1승 4패로 10위에 머물렀다. 최약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제외한 나머지 팀들에게는 그야말로 참혹한 대패를 당했는데, 중국에게는 63점 차, 미국에게는 76점 차 대패와 월드컵 한 경기 최다실점(145점)을 내주는 수모를 당했다.

정선민호는 이번 아시아컵을 앞두고서도 라트비아와의 두 차례 원정 평가전에서 심각한 졸전을 거듭하며 이미 본 대회의 암울한 복선을 예고한 바 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뉴질랜드는 우리가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상대였고, 중국전 역시 승리의 기회는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시드니 참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한국농구의 흑역사다.

물론 여자농구의 빈약한 선수층과 박지수의 컨디션 난조 등, 성적부진이 온전히 정선민 감독의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아쉬운 전술변화와 선수교체 타이밍 등 정선민 체제에서 대표팀의 경기력이 별다른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갈수록 퇴보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마땅한 전임 감독감이 없어서 단지 '여자농구 레전드'라는 이유로 감독 검증도 안된 코치에게 연달아 대표팀 지휘봉을 맡겨야했던 기형적인 구조는, 선수만이 아니라 지도자도 인재난에 시달리는 한국 여자농구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한국 여자농구는 이제 다가오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설욕을 노려야 한다. 하지만 아시아컵에서 보여준 경기력이라면 아시안게임에 대한 전망도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한때 한국과 대등하거나 한 수 아래였던 일본과 중국 여자농구가 승승장구하며 한국과의 격차를 점점 벌려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어느덧 인기도 관심도 유망주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한국 여자농구에 올림픽 진출 실패는 또 하나의 어두운 암흑기가 다가온 것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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