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맥베스’의 메시지가 정치권에 주는 교훈
‘사람은 젊어서 배우고 늙어서 이해한다’
오래전 책을 읽다가 수첩에 메모한 문장이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배운 것 중 이해하기 힘든 것이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말이었다. 아마도 당송(唐宋)의 시(詩)를 공부하다가 접한 것 같은데, 그때 왜 선생님은 기나긴 인생이 한낱 봄날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을까. 십 대 시절에는 누구에게나 시간이 더디게 간다. 그런 십 대가 이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늙어서 이해한다’는 말을 절감하는 대상이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주세페 베르디, 지그문트 프로이트, 구로사와 아키라, 저스틴 커젤, 조엘 코엔…. 분야도 다르고 활동한 시공간도 다르지만, 이들은 하나의 고리로 서로 연결된다.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이들은 모두 셰익스피어를 숭앙했다.
대학 시절 나는 영어영문학과를 다녔다. 대학 4년을 돌이켜 보니 그때 내가 가장 잘한 선택은 영어연극을 두 번 해봤다는 것이었다. ‘맥베스’는 캐스트로, ‘햄릿’은 스텝으로 각각 한 번씩 참여했다. 주인공 맥베스 역을 맡은 1년 선배가 그 긴 영어 대사를 외우던 모습이 지금도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내일, 또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 기록된 역사의 마지막 글자에 다다를 때까지 죽음은 이렇게 살금살금 걸어서 날마다 조금씩 다가오고 있지. 그리고 우리의 과거는 모두 바보들이 죽음으로 가는 길로 비춰 주었을 뿐. 꺼져간다. 꺼져간다. 짧은 촛불이여! 인생은 단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 나와서 뽐내며 걷고 안달하며 시간을 보내다 사라지는 서툰 배우.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찬 백치의 이야기···”(5막 5장)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베스가 무대 위에서 내뱉는 유명한 독백이다. 아마도 ‘맥베스’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문장을 고르라면 ‘Life is just walking shadow(인생은 단지 걸어 다니는 그림자)’가 아닐까. 눈이 밝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이 침침해지니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맥베스의 비극은 부인에게서 비롯되었다. 남편에게서 마녀의 예언을 전해 들은 아내는 남편에게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라고 부추긴다. 남편은 아내의 말에 흔들리고 마침내 권력욕에 눈이 멀어 왕을 시역(弑逆)한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것은 맥베스 부인에게 ‘양심’을 일깨운다는 점이 아닐까. 양심의 가책을 느낀 맥베스 부인은 밤마다 몽유병에 걸려 손에 피가 묻었다며 씻어댄다. 그러다 결국 자살하고 만다.
어떤 작품이 불후를 넘어 고전의 반열에 오르려면 시간의 파도를 이겨내야 한다. 400여년 전 세상에 나온 ‘맥베스’를 다시 떠올린 것은 덴젤 워싱턴과 주세페 베르디 덕분이다. 조엘 코엔 감독이 덴젤 워싱턴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맥베스’를 찍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코엔 감독이 비극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돋보이려 연극적 요소를 강조하며 흑백 필름으로 찍었다고 했을 때, 나는 자못 설레기까지 했다.
국립오페라단은 베르디 탄생 210주년을 맞아 4월 27일~4월 30일까지 오페라 ‘맥베스’를 무대에 올렸다. 베르디가 1847년 서른네 살에 작곡해 초연한 오페라다. ‘맥베스 오페라’는 오로지 베르디 버전만 존재한다. 어느 작곡가도 베르디 작곡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오셀로’를 제외한 ‘햄릿’ ‘맥베스’ ‘리어왕’은 감독과 배우가 한번 해봤으면 하고 탐내는 작품이다. 국내에서도 거의 매년 무대에 올려진다. 남자배우가 젊었을 때는 ‘햄릿’을 맡고, 중년이 되면 ‘맥베스’를 연기하고, 노년에 들어서는 ‘리어왕’을 한다는 말이 있다. 그 중 ‘리어왕’은 당대 최고의 배우가 맡는 역할이다. 전설적인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70대에 ‘리어왕’을 연기했고, 국내에서는 이순재가 80대에 ‘리어왕’을 맡았다.
할리우드에서 연출력을 인정받은 명감독들은 한가지 꿈을 꾼다. ‘맥베스’와 ‘리어왕’을 영화로 찍고 싶다. 그래서 셰익스피어 비극도 영화로 잘 만드는 감독이라고 인정받으려 한다. 그만큼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실제로 당대의 영화감독들이 셰익스피어에 도전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모두 셰익스피어 희곡의 중압감에 짓눌려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하지 못한 결과였다.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 역시 세계에서 연출력을 인정받은 뒤 셰익스피어에 도전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맥베스’. 그는 할리우드 감독들과는 접근법이 달랐다. 주제만을 가져왔을 뿐 그는 모든 걸 일본식으로 바꿨다. 공간은 전국시대 일본. 제목은 ‘거미집의 성’. 흑백 영화를 찍으면서 셰익스피어 희곡 특유의 현란한 수사는 가차 없이 잘려 나갔다.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는 ‘맥베스’에 단역으로 출연도 해보고 희곡도 여러 번 읽었지만 ‘거미집의 성’을 접할 때까지 ‘맥베스’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무대를 스코틀랜드에서 일본 전국시대로 바꾸고 화려한 수사도 다 걷어낸 ‘거미집의 성’을 보고 나는 비로소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이번에 나온 조엘 코엔 감독의 ‘맥베스’는 구로사와의 ‘거미집의 성’ 못지않다는 평을 받는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 여성이 주인공 역할을 맡은 것도 ‘맥베스’가 거의 유일하다. ‘햄릿’의 경우 오필리아도 나름대로 비중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조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맥베스 부인은 당당한 주연이다. ‘레이디 멕베스’ 역은 강렬한 캐릭터로 인해 실력파 여배우들이 탐내는 배역이다. 여성은 연약하고 수동적이어서 권력의 욕망이 없다는 오랜 고정관념이 산산이 부서진다. 프랑스 배우 마리옹 꼬띠아르가 저스틴 커젤 감독의 ‘맥베스’에서 ‘레이디 맥베스’를 맡았다는 사실에서 이를 잘 보여준다. 꼬띠아르는 탐욕의 화신을 멋지게 소화했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이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다. 돈에 팔려 간 젊은 부인이 남편의 외도와 무관심을 견디다 못해 하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다. 1934년 1월,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곡을 붙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모스크바 말리 극장에서 초연됐다. 이 오페라는 2년간 5개국에 공연될 정도로 대중성을 받았다. 하지만 1936년 1월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가 “음악이 아니라 황당무계”라고 평하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칼날 위에 선다. 스탈린이 휘두르는 피의 폭정(暴政)에서 목숨을 부지하려 전전긍긍한다.
2017년 영국에서 나온 영화가 ‘레이디 맥베스’다. 줄거리 구조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와 비슷하다. 열일곱 처녀가 늙은 지주에게 팔려 지주의 아들과 사랑 없는 결혼을 한다. 남편은 바깥으로 떠돌고 집에 있는 날이 없다. 욕망을 채울 길이 없는 캐서린이 반항적인 하인에게 끌려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 남편을 죽이게 되고 점점 교활해지고 사악해져 간다는 서사 구조다. ‘레이디 맥베스’에서는 하인 세바스찬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워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최근 정치권을 보면 먹잇감에 침을 흘리며 눈알을 희번덕거리는 하이에나 떼와 다를 바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입만 열면 번드르르한 말을 하면서 행태는 거의 조폭 수준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탐욕의 끝은 언제나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이 ‘맥베스’의 메시지다. 레이디 맥베스는 뒤늦게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괴로워하기라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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