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글돈글]그 여자, 밤길 뚫고 ATM 달려가는 사연
사설 ATM 기기로 카드 정보 탈취
美, 피해 액수조차 집계 안해
카드 보안 강화에 수년 걸릴 듯
편집자주 - 전 세계 곳곳에서 돈이 도는 모든 이야기를 재밌게 소개해드립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부터 먼 나라 유럽까지, 각 나라의 시장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어떻게 돈이 흐르고 있는지 친절한 경제 기사로 접해보세요.
최근 외신에는 매달 초 정부 지원금이 입금되는 자정이면 ATM(현금인출기)로 달려가는 한 미국 여성의 사례가 소개됐습니다. 미국 위스콘신주 그린베이에 거주하는 이 여성은 카드가 복제되면서 석 달째 정부 지원금이 카드에서 인출되는 피해를 보게 됐습니다. 피해 액수는 점점 커져 결국 월급 1300달러(약 171만원)까지 모조리 통장에서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해당 여성은 누군가가 현금을 빼갈 것이 두려운 나머지 결국 매월 1일이면 밤길을 뚫고 ATM으로 향하게 됐습니다.
이처럼 미국에는 현재 카드 복제 이른바 '스키밍'사기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스키밍 사기란 타인의 카드 정보를 빼내 금전을 탈취하는 범죄 수법을 일컫습니다. 사설 ATM에 복제기를 달아 카드 마그네틱 선을 복제해 사용하는 수법이 가장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주된 피해는 저소득층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지만, 정부의 해결안이 실행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오늘은 이들이 어떤 이유로 범죄의 표적이 된 것인지, 그리고 이들의 피해가 미국 내 어떤 사회적 파장을 낳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소득층 지원금, 범죄 타깃…복지 카드 보안 뚫어
사기범들이 저소득층을 범죄 타깃으로 삼는 이유는 이들이 매달 수령하는 정부 지원금 액수가 쏠쏠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저소득층 통장에는 매달 초 여러 종류의 정부 지원금이 입금됩니다.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매달 빈곤가정 임시 지원 프로그램인 캘웍스(Cal works)를 통해 저소득층에게 연간 72억달러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1인 기준으로는 매달 최대 122달러를 현금으로 받을 수 있죠.
이 밖에도 미국 정부는 저소득층에게 보조 영양지원프로그램(SNAP)을 통해 1인당 평균 280달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1270억달러의 예산을 SANP 지원금으로 편성했는데, SNAP을 통해 뿌려지는 액수가 크다 보니 이 또한 범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미국 정부의 구시대적인 '지원금 카드'가 사기에 더 취약한 환경을 만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미국 정부는 IC칩이 탑재되지 않은 마그네틱 카드를 통해 정부 지원금을 지급합니다. IC칩은 카드 단말기에 꽂아서 이용하는 반면 마그네틱 카드는 긁어서 돈을 지불하죠. 마그네틱카드는 IC 카드에 비해 데이터의 복제 등 해킹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한국도 현재는 마그네틱 카드 대신 IC 카드를 이용하는 추세입니다.
사기범들은 이 허술한 보안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온라인 사이트에서 ATM 카드 리더 단말기를 구입해 스키밍 장치를 부착합니다. 그리고 ATM 이용자가 이 단말기 삽입구에 카드를 꽂으면 카드 비밀번호와 계좌번호 등을 빼서 카드를 복제합니다.
◆피해 액수 집계 안 돼…물건 되팔이 사기 수법 다양
미국 정부가 이 범죄를 통해 입는 손실은 얼마나 될까요? 놀랍게도 아직 그 액수조차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미국 사회복지 부서는 이 스키밍 범죄 피해 사례와 액수를 제대로 집계하지 않았습니다.
피해 건수도 민간 기업이 일부 지역에 한정해 집계한 수치가 전부라, 구체적인 파악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미국의 사기 방지 솔루션 제공 기업인 렉시스넥시스가 올 1월 미국 연방경찰로부터 보고받은 스키밍 사기 건수는 1만8000건에 달합니다. 이는 지난해 1월(300건)과 비교해 60배나 늘어난 규모입니다.
다만 유일하게 스키밍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지원금을 재지급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의 재지급 금액 정도로, 피해 규모를 추산해 볼 수 있습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주는 2021년 피해자들에게 지원금을 재지급하는 데만 매달 1억여원을 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액수는 점점 늘어나서 지난 3월까지 131억원 수준으로 불어났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는 다른 지역보다 저소득층 대상 복지프로그램이 탄탄하게 마련해 놓고 있어, 스키밍 사기가 다른 주보다 2배 정도 더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범죄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자, 사기범들은 이제 식비 지원 바우처까지 노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우처를 현금으로 바꿔 고자 복지 카드를 대량 복제한 뒤 온라인상에서 고가의 식품을 구입해 되파는 식으로 지원금을 갈취합니다.
◆美 정부, 대책 마련 지지부진…소득별 금융보안 차별 지적도
스키밍 사기 총책을 잡기 위한 미국 정부의 노력은 진척을 보이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사기 조직에 속한 스키밍 사기범들은 조직원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총책의 지휘를 받아 독립적으로 범죄 행각을 벌이고 있어, 경찰이 조직원 한명을 잡아도 공범을 파악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태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자 복지업계에서는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정부가 카드의 보안을 강화하고 피해자들에게는 지원금을 다시 지급하는 등의 사태 수습이라도 나서야 한다는 것이죠.
결국 미국 정부는 지원금 지급 수단에 대한 보안 강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복지 카드를 모바일 결제 시스템으로 바꾸기까지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그동안 또 얼마나 많은 사기가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복지 전문가들은 미국 정부가 저소득층의 금융 보안에 손을 놓고 있다는 점도 강하게 지적합니다. 만약 고소득층이 카드 보안 문제로 현금 인출 사기를 당했다면 그래도 정부가 손을 놓고 있겠냐는 것이죠. 일부 전문가들은 스키밍 사태를 단순한 사건 사고로 치부하기보다는 금융 보안에 있어서의 저소득층과 고소득층 간의 차별 문제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과연 미국 정부는 과연 스키밍 사기를 방지할 효율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저소득층도 안전한 결제망에서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날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이지은 기자 jelee042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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